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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 역사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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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 역사 얘기

세종을 가르친 행복한 스승, 이수 선생

~@img!!김영칠 수필가 인생사에 있어서 ‘사제의 만남’처럼 소중한 인연도 없을줄 압니다. 좋은 만남으로 감동적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어긋난 운명으로 가슴아픈 일도 있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양녕대군과 변계량선생의 만남이 불행한 관계였다면, 이번에는 매우 행복한 만남을 소개합니다. 고매한 인품과 높은 학문으로 제자를 계도한 스승, 그리고 스승의 높은 뜻을 깊이 이해하고 부응하여 위대한 보람을 만들어 낸 제자, 그리하여 돈독한 사제관계가 일생동안 한결같았던 아름다운 인연이 우리역사에 남아 있지요. 바로 세종대왕과 이수선생의 만남입니다. 이수(李隨, 1374-1430)선생은 자가 택지(擇之), 호는 심은(深隱)으로 봉산이씨(鳳山李氏)의 시조 입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성균관 생원시험에 1등 할만치 머리가 우수했지만, 어쩐일인지 대과에는 번번히 낙방하고 포의로 있을 때, 열살의 어린 충녕대군을 만납니다. 선생이 33세 되는 1407년(태종7) 태종이 성균관 대사성 유백순을 불러, 생원중에서 효령과 충녕의 두왕자를 가르칠 선비를 추천하라고 명합니다. 이에 유백순은 “생원 이수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학문이 정숙 합니다”라고 추천 하지요. 그런데 선생은 두 대군을 가르친지 얼마 되지않아, 과거 공부를 이유로 사양하고 돌아 갑니다. 그러나 또다시 낙방하고 초야에 묻혀 지냈는데, 태종이 도승지를 보내 다시 불러 올립니다. 선생이 올라오자 태종은 옷 한 벌을 하사하며, 두 대군의 공부를 각별히 부탁 하는데요. 충녕은 확실히 남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글씨쓰기와 그림그리기, 악기연주등 예술방면에도 두루 재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던지 부왕이 독서 금지령을 내릴정도 였습니다. 내가 경서와 역사서는 보지않은 책이 없다”고 할 정도로 자타가 인정하는 학구파였기에, 왕세자 양녕의 시강관이었던 변계량선생은 충녕의 공부자세를 무척 부러워 했다 합니다. 충녕은 요동치는 궁정사와 거리를 둔채, 신중한 처신으로 오직 글공부와 덕행을 쌓는 일에 전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서열상으로 왕세자와는 무관한듯 했지만, 객관적 예상을 깨고 대권의 행운을 잡을수 있었던 이면에는, 인간 이도(李祹, 충녕대군의 이름)의 탁월한 품성과 지혜로운 자질, 그리고 각고면려의 노력이 크게 작용 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난 옥을 갈고 다듬어 찬란한 광채를 내도록 이끌어준 큰 스승, 이수선생의 깊이있는 가르침과 계도가 숨어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 같군요. 선생이 대과에 급제한 것은 그의 나이 41세때인 1414년(태종14)이니까, 성균관 생원시험에 1등 합격한 때로부터 무려 18년후가 됩니다. 학문과 인품이 도저(到底)한 시강관 임에도, 대과에 번번히 낙방한걸 보면 학문의 깊이와 시험은 별개 인것 같기도 합니다. 대기만성이란 말처럼 선생은 비록 늦게 출발 하였지만, 벼슬길은 탄탄대로 였고 승승장구 하였습니다. 황해도 관찰사를 필두로 의정부부참찬,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중용되었지요. 그러나 인생사 호사다마라! 선생이 병판으로 있던 어느날, 술에 취한 상태로 말을 타다가 그만 실수로 떨어져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 선생의 나이 57세. 스승의 부고를 들은 세종은 거애(擧哀, 머리를 풀고 곡을 하는 것)하고 3일동안 조회를 정지 시켰지요. 그리고 부의와 함께 교서를 보내 스승의 별세를 진심으로 애달파 했습니다. “경은 학문이 정밀하고 넓으며, 행동이 단아하고 방정하였다. 태종께서 경을 백의로 등용하시어, 내가 어렸을때에 가르침을 받았다...이제 경을 심복으로 삼아 길이 의지하고 귀감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어째서 하늘은 경을 급히 빼앗아가서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가. 이에 소복을 입고 슬프게 곡하며, 따로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노라. 슬프다. 생사의 무상함은 운명이라 피할수 없지만, 은의가 이미 지극하니 살고 죽음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스승에 대한 세종의 존경은 극진하고 돈독해서 수시로 스승의 가르침을 경청했고, 스승의 품계와 예우를 배려하는데 한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합니다. 선생또한 추호도 어긋남 없이 겸손한 자세와 지극한 정성으로 임금을 모셔서 조정의 귀감이 되었다 합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선생에게는 문정공(文靖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 되었지요. 성군을 배출하는 것이 모든 시강관들의 꿈이자 최고의 영예 였다면, 선생이야말로 조선 최고의 성군을 가르친 행복한 스승이라 하겠습니다.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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