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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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img!!김영칠 수필가 오늘날은 웃기느라고 옛날의 관직호칭을 장난삼아 부르기도 하고, 심지어는 애들한테 임금님만 착용하던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혀서 사진을 찍기도 하구요. 나이든 남편이나 나이많은 노인을 흔히 ‘영감’이라 하고, 웃사람을 농담조로 ‘나리’라 부르기도 하지요. 조선왕조의 사실상의 설계자는 삼봉 정도전 (三峰 鄭道傳,1337-98)인데요. 그가 중국의 이상적인 정치규범인 주례(周禮)를 참고하여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을 편찬하고 궁궐의 배치와 명칭, 통치체제의 구조와 관직의 기본틀을 만든건 잘 알려진 얘기지요. 조선왕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이 완성된건 성종때 였구요. 오늘날의 일반직공무원 직급체계는 1급(관리관)에서 9급(서기보)의 아홉단계로서, 정무직인 장차관이나 국무총리는 범위 밖인데요. 조선조의 벼슬체계는 정1품에서 정9품의 아홉단계를 기본으로 하되, 각단계마다 품계를 하나씩 추가해서 사실상의 등급을 18계단으로 만들고, 그안에 모든 벼슬체계를 망라한 점이 특징이지요. 18계단 이라는건 ‘정(正)’밑에 ‘종(從)’을 각각 붙이는건데, 정1품.종1품, 정2품.종2품...정6품.종6품...정9품.종9품 이런식이죠. 임금다음으로 높은자리인 영의정은 정1품이고, 가장 말단은 종9품으로 참봉이나 훈도등 이었지요. 경복궁에 가 보시면 근정전 계단아래, 좌우로 품계석이 서 있는걸 보셨을 텐데요. 이러한 등급의 세분화는 벼슬자리수와 업무량, 위계질서확립등 통치체제와의 복잡한 함수관계가 얽혀있지요. 그래서 1품의 삼정승을 공(公), 2품의 판서급을 경(卿), 중간관료급인 4품이상을 대부(大夫), 5품이하를 사(士)로 구분했는데, ‘공경대부’ 또는 ‘사대부’란 말은 여기서 나왔지요. 지금도 뼈대있는 가문의 족보나 묘소의 비석을 보면, 알듯 모를듯한 거창한 관직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걸 볼수 있는데요. 조상의 벼슬을 들먹이며 어깨를 재 봐야 별건 아니지만, 수백년전 옛날에는 그 위세가 대단 했대요. 문벌이나 가문의 전통도 그런 자존심에서 나오는 거구요. 품계명칭을 보면, 정1품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종1품은 숭록대부, 정2품은 정헌대부, 종2품은 가정대부...정5품은 통덕랑, 종5품은 봉직랑... 이런식으로 같은품계 안에서도 명칭과 위계에 차등을 두었지요. 같은 정3품 이라도 통정대부이상은 당상관, 통훈대부이하는 당하관으로 구분했지요. ‘상감’은 임금의 높인말로 오직 국왕에게만 썼구요. 정2품이상은 ‘대감’, 정3품 통정대부이상 종2품은 ‘영감’, 정3품 통훈대부 이하는 모두 ‘나리’로 불렀대요. 관직은 ‘계(階).사(司).직(職)’이라하여 품계,소속,직위로 표시하는데 예를들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이라 할 때, ‘대광보국숭록대부’는 품계요, 의정부는 소속관청이며, 영의정은 직위가 됩니다. 흔히들 ‘1인지하에 만인지상’이란 말은, 백관의 수장인 영의정을 이르는 것이지요. 드라마 ‘용의눈물’을 보면, 도승지가 태종과 마주앉아 얘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대통령비서실장격인 도승지는 정3품 이었지요. 그리고 ‘언론3사(三司)’라 하여, 국왕의 교서작성과 경연을 주도하는 홍문관의 대제학은 정2품, 관원의 비행을 감찰하는 사헌부의 대사헌은 종2품, 정책을 비판하고 간쟁하는 기관인 사간원의 대사간은 정3품 이었구요. 수도서울시장격인 한성부 판윤은 정2품 이었어요. 외관직인 지방수령의 경우, 현재의 도지사격인 감사나 관찰사는 종2품 이었는데, 옛날에도 우리철원은 규모가 큰 편이어서 종3품인 도호부사가 관할 하였대요. 고을원인 군수는 종4품, 현령은 종5품, 현감은 종6품이었구요. 이충무공은 종6품직인 정읍현감으로 있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7단계를 뛰어서 종3품의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 되었지요. 문과의 경우, 과거에 장원급제를 해야 종6품을 주고, 최하등급인 병과23등을 하면 8품이나 9품을 주었대요. 능지기인 능참봉은 최말단 종9품인데, 옛날에는 그 끝발이 원님 부럽지 않았다나요. 하긴 관(官)자 하나만 찍어서 내 비치면, 귀신도 의악소리를 치고 도망 갔다네요. 믿거나 말거나.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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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부담없이 즐기는 우리 역사얘기~@img!!김 영칠(철원향교 명예기자) 우리나라 역대 임금님들은 가족관계가 어떨까요? 부인은 몇분을 두셨고, 자식은 몇을 낳으셨는지? 궁금하군요. 역대왕조의 나라경영체제는 거의가 중국의 제도를 따랐는데요. 대략2600년전 중국 주나라의 제도에 의하면, 천자에게는 등급에 따라 정부인이 셋, 빈(嬪)이 아홉, 세부(世婦))가 일곱, 어처(御妻)가 여든하나이고, 첩(妾)은 제한을 두지 않았다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황제는 천이백명의 후궁을 거느렸고, 진시황제는 만여명, 한무제는 만 팔천여명, 그런가 하면 당태종은 무려 4만여명 이었대요. 이건 아마 과장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숫자 부풀림 같기도 하구요. 흔히들 삼천궁녀라 하는데, 그건 실제숫자가 아니고, 그만큼 많다는 일반적표현이라 하는군요. 고려조의 베스트는 단연 태조왕건 입니다. 그는 공식적으로 스물아홉명의 부인에게서 서른여섯명의 자녀를 두었지요. 부인이 이렇게 많았던 것은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지역통합과 왕권강화를 위한 정략결혼 때문이라고 하네요. 고려는 100여년이 넘게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공민왕등 여섯이 원의 사위노릇을 했는데요. 특히 성불구자로 알려진 31대 공민왕은, 원출신인 노국대장공주를 비롯하여 부인이 여섯인데, 그중 반야는 승려신돈의 비첩 이었지요. 그래서 32대 우왕은 신돈의 아들이란 얘기도 있구요. 그런 우왕은 부인아홉에 달랑 아들하나를 낳았는데, 그가 33대 창왕. 그의 아들인 34대 공양왕은 부인하나에서 자녀넷을 낳았지만, 비명에 가면서 고려는 475년만에 문을 닫았지요. 조선왕조의 태조이성계는 부인셋에서 자녀열셋, 학자임금이신 4대 세종대왕은, 부인여섯에서 5대 문종과 7대 세조를 비롯한 18남 4녀를 낳으셨죠. 한글창제등 많은일을 하시면서 언제 그 많은 애들을 만드셨는지? 조선조의 베스트는 아무래도 9대 성종 일거예요. 그는 13세에 등극하여 25년간 재위하면서 세종 다음가는 많은 치적을 쌓았는데, 부인 열둘에서 스물여덟의 자녀를 두고 보령38세에 돌아간걸 보면, 아무래도 너무 밝힌게 단명의 원인 아닐는지. 19대 숙종이 무수리 최씨에게서 낳은 21대 영조는, 재위52년에 82세의 최장수를 누리셨죠. 탕평책등 영정조 문화르네상스시대를 열기도 하였는데, 세자인 자기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일마큼 성정이 대단했대요. 정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66세의 고령에 15세의 계비를 맞아 들일만큼 기력이 왕성 하셨다나요. 구리시의 동구릉에 가보면, 부인둘을 사이좋게 거느리고 3연릉으로 누워계신 임금님을 만날 수 있는데 24대 헌종입니다. 여덟살에 등극하여 재위15년만인 보령23세에 승하했는데, 너무 여색을 가까이 하셔서 피와 가래를 토하고 돌아갔대요. 일본낭인들 손에 시해당한 명성황후 민씨의 남편인 26대 고종은, 일곱부인 한테서 여덟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어느날 식혜를 잡수신후 갑작스런 토사곽란 끝에 운명하셨대요. 고종의 독살설과 관련하여 간교한 왜놈들 짓이란 소문이 많았지요. 그리고 쓸개빠진 을사오적신의 패역으로, 조선조는 519년만에 명을 다했습니다. 임금의 목숨이나 평범한 백성의 신세나, 허망하긴 매일반 이네요. 쯧쯧. (김 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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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담없이 재미로 듣는 우리역사 얘기~@img!!김 영칠(철원향교 명예기자) (힘들고 어려운 세상입니다. 이런땐 낙관과 여유로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숨겨져 있는 일화와 비밀스런 얘기들을 끄집어 내서 심심 파적으로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때로는 황당한 얘기들도 나오는데 그런건 믿거나 말거나, 그냥 재미로 웃어 넘기시구요. 자, 그럼 시작을 하겠습니다.) 조선조500년 역사에는 모두 스물일곱분의 임금이 계셨습니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종’, 이렇게 외워서 공부한 시절도 있었지요. 1대는태조, 2대는정종, 3대는태종...7대는세조...그리고 마지막 27대는 순종으로, 어떤분은 조, 어떤분은 종 그렇습니다. 패륜행위를 하다가 중도에 쫒겨난 임금 두분은 그냥 연산군, 광해군 이구요. 조와 종을 붙이는 기준에 관하여는, 일찍이 중국의 공자께서 “예에 이르기를, 공이 있는 임금은 조라하고, 덕이 있는 임금은 종이라 한다”고 말씀 한바가 있는데요, 우리나라는 중국의 한,당제도를 따른 겁니다. 나라창업이나 변란진압에 공이 있으면 조, 덕으로 잘 다스렸으면 종으로 구분 한것이지요. 임금이 돌아가시면, 조정중신들이 왕의 업적을 평가하여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을 ‘묘호’라고 합니다. 묘호는 왕실사당인 종묘에 신위를 모시기위해 정하는데, 묘호제도의 시작은, 고려의 통치질서를 완성한 6대 성종(981-997)때라 하는군요. 조선시대에, 조를 붙인 임금은 태조,세조,선조등 일곱분, 종은 태종,세종등 열여덟분이지요. 선조,영조,정조는 본래 선종, 영종, 정종이었는데 나중에 재평가하여 조“‘로 바꿨다나요. 그러면 전왕의 업적을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임금이 돌아가시면, 약200여명의 편찬위원이 위촉되어 서로 업무를 분담해서 실록작업에 들어가는데, 이를위해 임금이 생전의 활동시에 신하들이 기록한 사초(史草),시정기(時政記),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조보(朝報)등이 참고자료로 제공 되었구요. 임금님은 매일매일 신하들을 만나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했는데, 이때 승정원과 예문관에서 파견된 정7-9품의 하급관리들이, 임금의 좌우에서 말과 행동을 나누어 적었답니다. 예문관 관리가 작성한 자료를 ‘사초’라 하는데, 생존한 임금은 자기기록을 절대 볼수없도록 제도화 되어 있었다 합니다. 그래서 공로도 쌓고 너그럽게 잘 다스리다 가시면, 조나 종의 묘호를 받아 만세역사에 이름을 올릴수 있지만, 못된짓을 하면 ‘연산군’ ‘광해군’같이 살아서도 구박이요, 죽어서도 종묘에 들지 못하는 찬밥신세가 되는 것 이지요. 근데 조와 종의 선정기준도 웃기는게, 그런 사람이 무슨 공로가 있다고 ’조‘고, 저런 인물이 뭔 덕이 있다고 ’종‘인지? 아리송 아리송 하네요.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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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군민의 편의와 빠른 정착을 위해~@img!!신철원1리 이창근 대한민국의 주소가 확 바뀌었다. 지번주소로 수십년간 이용하던 우편발송 주소가 지번 주소에서 도로 명 주소로 바뀐 것이다. 우리의 머리에 각인된 것은 몇 리, 몇 반, 몇 번지로, 일상생활에서 이용했기 때문에 지금 도로 명 주소로 바뀐 후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지금 현재는 홍보적인 차원에서 두 가지를 혼용해서 이용하기 때문에 불편함을 모르겠지만, 홍보기간이 지난 후 도로 명 주소를 일괄적으로 이용해야하는 시기가 왔을 때, 큰 불편함과 대 혼란이 올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웃 간에도 청첩장이나 안내장을 보내려 해도 일일이 전화를 하여 도로 명 주소를 문의하고 알아보아야 하는 번거로움과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담당 관공서에서는 지번 주소가 도로명 주소로 바뀐다는 홍보만 할 게 아니라 전화번호 책자처럼 도로 명 주소 책자를 발간하여 가구마다 1부씩 배부해 주면 주소를 알아보는 번거로움도 해소될 뿐 아니라 도로 명 주소가 정착되는 기간도 매우 짧아질 수 있다고 본다. 이왕이면, 철원군 행정에서 관계기관과 잘 협의하여 철원군만이라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처음 철원군 도로 명 주소록 책자를 발간하여 군민들의 편의를 제공하고 도로 명 주소 정착에 한걸음 더 빠르도록 신경 써주기를 군민의 한 사람으로서 건의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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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화목한 가정은 명절이 즐겁다.~@img!!아이들은 추석이나 설 등 명절이 돌아오면 마냥 즐거워하지만 어른들은 명절이 되면 고달프다고 한다. 특히 종가 집 며느리들은 음식 준비할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한다. 명절이 되면 맏며느리는 혼자만 고생 하는 거 같아 싫고, 작은 며느리들은 큰집에 가봐야 식모노릇만 한다고 큰 집 가기 싫어하고, 남자들은 마나님들 눈치 보기 바쁘다. 객지에 나가있는 형제들은 고향을 찾았던 향수도 잠시이고 귀성길의 교통지옥이 끔찍하기만 하단다. 모처럼 친 일가들을 만나 반가운 것도 잠시일 뿐 비교의식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게 된다. 더군다나 경제적으로 힘이든 사람은 추석이 돌아오는 것이 무섭단다. 명절이라 하여 다들 고향에 가는데 안갈 수도 없고, 가자니 몸과 마음이 고달프고 명절이 웬수란다. 심지어는 차례지내기 싫어 교회에 나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첫째. 종가 집에서 나 홀로 음식 장만하는 수고를 덜어 주어야 한다. 형제들끼리 음식을 나누어 준비해 가지고 가면 된다. 각자 집에서 음식 한가지씩을 만들어 오면 된다. 그러면 추석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불필요한 경비를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제수용품이 될 만한 과일등도 미리 분배하여 사오면 선물을 무엇을 살까 고민을 안 해도 된다. 둘째,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마음에 안 들어도 따져서는 안 된다. 심지어 명절에 못 오면 전화라도 하여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격려를 해줘라! 절대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이건 특히 장남의 몫이다. 부모 자식은 상하관계지만 형제는 수평관계다. 형이 사랑을 보일 때 동생들은 존경으로 보답한다. 형이 동생들을 좋아하는 후배 대하듯 하면 된다. 그러면 우애가 더욱 깊어진다. 특히 유교적 사고를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형제관계를 상하관계로 착각하고 있다. ‘에헴~ ’하고 대접받으려 하면 다 도망가고 오지 않으려 한다. 사회에서도 선배가 대접만 받으려 하면 선후배 관계가 좋을 리 없다. 사회에서 ‘선배님!’하면 술과 밥 사는 건 물론이고 애로사항 해결을 선배가 다해준다. 그 대가로 후배는 선배를 깍듯이 모시고 선배는 리더십을 확보한다. 집안에서도 형이 리더십을 발휘하려는 노력도 없이 그냥 동생들이 잘하기만 바라면 착각이다. 사회에서 후배가 집에 찾아 왔다고 생각하라, 동생들을 어릴 적 생각만 하고 만만하게 대하면 마음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진다. 가정을 화목하게 이끄는 것은 장남의 중요한 역할이다. 셋째, 형제간에 마음 한구석에서라도 비교의식을 가지면 안 된다. 비교를 하게 되면 열등의식(Complex)이 생겨 관계는 불편해진다. 특히 며느리들이 주의하여야 한다. 상대방이 말하고 싶지 않은 걸 화두로 올려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아들이 대학에 낙방하여 속상한데 자식이 좋은 대학에라도 들어간 형제가 ‘조카 아무개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면 짜증이 나게 된다. 묻는 사람은 우월의식을 느껴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기분이 나쁘다. 넷째, 명절에 가족이 무엇을 해줄 걸 기대하지 마라.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하게 되고 실망은 삐치게 만들어 불화의 씨앗이 된다. 만나는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라. 아프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도 감사한 것이다. 특히 친구네는 가족들이 뭘 해 왔는데 하고 비교 하는 건 절대 금물이다. 그게 부러우면 문자로라도 뭘 해 오라고 말을 해야 한다. 점쟁이도 아닌데 원하는 걸 어떻게 알고 해오겠는가? 다섯째, 웃으며 덕담 한 가지는 꼭 해줘라! 칭찬은 고래도 신나게 만든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칭찬해 주면 좋아한다. 불편한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마라. 모처럼 만난 가족에게 옛날 섭섭한게 있더라도 따지지 마라. 따지면 섭섭하고 또 삐치기까지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훈시 하는걸 좋아하지만 반대로 나이가 어릴수록 훈시 듣는 걸 싫어한다. 훈시를 하면 분위기만 썰렁해 진다. 모처럼 만난 가족에겐 덕담 하는 게 최고다. 가정도 정치다. 가족도 국민이나 조직에서 조직원 대하듯 하면 된다. 처음만난 사람 대하듯 친절하게 하면 가족이 화목하다. 왜 남한테는 친절하면서 가족에게는 권위적이고 불친절할까? 이 다섯 가지만 명심하여도 명절은 적어도 외형상 평화롭고 웃을 수 있다. 명절은 부모님 때문에 불편한 것은 거의 없다. 남 즉 며느리와 사위가 끼어 있어 형제간이 남도 아니고 결혼하기전의 형제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사실 여자들끼리 사이가 좋으면 집안에서 문제가 될 일이 별로 없다. 요즘은 여성위주 사회다. 가정에서 여자가 주도권을 가진지 이미 오래 되었다. 며느리들끼리 서로 이해하고 사이가 좋으면 형제 들 간에 오해가 있어도 오히려 풀어 준다. 하지만 남남끼리 만나 며느리들끼리, 시누와 올케,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가 좋기는 쉽지 않다. 만약에 여자끼리 서로 이해하고 좋아하는 집안은 큰 복 받은 집안이다. 며느리들께서 명절 때만이라도 남자들 체면 세워주면 명절은 즐거울 수 있다. 어려서는 엄마 말이면 꼼짝 못하고, 커서는 아내 말이라면 깜빡 죽고 늙어서는 딸의 말이면 무조건 따르는 것이 남자다. 여자는 여자의 생각이 집안은 물론 사회의 분위기를 좌우한다는 걸 명심하여야 한다. 명절뿐만 아니라 가족끼리의 화목여부는 여자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곤란하다. 새 가족이 된 여자들 끼라 사이가 좋을 수 있도록 남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 안보면 보고 싶고, 보면 재미있는 형제간의 우애가 결국 명절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다.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면 교통지옥도 음식 장만 하는 것도 결코 힘이 들지 않는다. 화목한 가족은 명절이 즐겁다! 한국농어촌공사 영북지사 박종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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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스포츠 꿈나무 파이팅!~@img!!얼마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맹 활략을 하고 있는 박지성 선수가, 2013년 6월까지 2년간 재계약을 하면서, 그의 연봉이 약 86억원 가량 되는 것으로 보도 되었습니다. 계산해 보면 1주일에 약 1억6천5백만원씩 버는 것으로, 실로 가장 작은 규모의 움직이는 중소기업이라 하겠으며, 더구나 그가 스포츠 마케팅으로 벌어들이는 수입까지 합치면 정말 우리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액수의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난해 1년 동안,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는 약 116억원을 벌어 들였고,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905억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스포츠가 우리 인류사회에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으며, 스포츠를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많고, 스포츠 스타들의 인기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스포츠 스타들의 인기를 활용해, 기업들이 비싼 광고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제품을 홍보하거나 판매를 하는 것입니다. 즉, 스포츠 마케팅이란 스포츠를 이용하여 기업의 제품을 홍보하거나 판매를 하는 행위를 말하며, 구체적으로 기업이 직접 스포츠 팀을 운영하거나 특정 유명 선수나 팀, 그리고 국내외 대회를 스폰서 하면서, 제품과 서비스를 홍보하기도 하고, 그에 따른 기업의 이미지를 높여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 하고자 하는 기업의 활동을 말 합니다. 물론,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들, 각 분야의 유명 인사들을 광고 모델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중에서 특히 인기 스포츠 스타들의 광고효과는 “인기 짱”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포츠 스타가 거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재능과 피나는 노력, 주위의 관심, 격려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공하기까지는, 부모님들의 시간 경제적 희생은 물론, 주변의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후원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군에도 이러한 가능성이 있는 스포츠 꿈나무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고, 그들을 키우느라 부모님들이 정말 많은 희생을 감내하고 있으며, 주변의 관심과 후원이 미약해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주) 그래미 남종현 회장께서, 철원에서 개최하고 있는 DMZ 마라톤 대회와 전국 유도대회 등에 많은 후원을 하고, 유도의 꿈나무들이 유도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있으며, 최근 강원 FC 사장을 맡아 활약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이라 하겠습니다. 지난 8월16일 중국 선전에서 개최된 제26회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유도 60㎏ 이하 급에서 금메달을 따낸 용인대 소속 김원진 선수(동송읍 오덕5리, 부:김기형)를 비롯한 유도 꿈나무 유학생들, 포항제철 중학교 축구선수로 제46회 춘계 한국 중등 축구연맹전 우승 주역인 박종철 선수(서면 와수 리, 부:박칠규)를 비롯한 축구 꿈나무들, 한국체대 4학년 배드민턴 이정환(내대1리, 부:이재억) 선수 등 약 20여명의 선수들이 객지생활을 하며, 시간, 경제적 어려운 여건 하에서 열심히 땀방울을 흘리고 있고, 그리고 외지 유학생 생활을 마치고도 관내 육성팀이 없어 외지 실업팀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나름대로 철원을 알리고 있는, -테니스 양천구청 소속 이진아 선수(와수6리, 부:이성원), -레슬링 태백시청 소속 임휘훈 선수(신철원4리, 부:임상열) -육상 허들 파주시청 소속 이지민선수(학사5리, 부:이청일) -축구 포천시민구단 소속 김한샘(신철원4리, 부:김광식), - “ 김영준(지포1리, 부:김안태) 선수를 비롯한 많은 선수들이 스포츠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 어려운 여건 하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공해서 인기 있는 스포츠 스타가 되었을 때, 고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부끄럽지 않은 지역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부터라도 관심을 갖고 지역차원의 후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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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욕설과 비방~@img!![독자기고] 욕설과 비방 국운이 쇄하면 강대국의 제물이 된다. 청나라는 인조 1636년 12월에 빠르게 침략을 해 왔다. 조선에게 요구한 사항이 수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빌미였다. 조선은 이미 7년간의 임진왜란을 치렀던 터라 많이 지쳐 있었고 인조는 추위와 비축하지 못한 식량에 결국 40일 만에 비굴하게 항복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는 많은 부녀자들을 성노리개 감으로 잡아갔다. 조선 백성들은 궁궐 앞에서 아내와 딸과 며느리를 찾아달라며 호소했다. 청은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고 하자 백성들은 전답을 파는 등 댓 가를 치르고 부녀자들을 찾아오게 됐다. 결국 돈을 주고 사람을 데려오는「속환」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하지만 이런 수모를 겪은 부녀자들은 또 한 번의 아픔을 겪는다. 이미 실절했다는 이유로 남편과 시부모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호로자식과 환향녀」 갖은 수모를 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서 붙여진 환향녀의 유래가 이처럼 애틋하다. 환란 중이라 청나라에 잡혀간 부녀자들 대부분은 성노리개 감으로 있었기에 임신을 해서 들어온 이들도 많았고 여기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아비 없는 자식이란 뜻으로 호로 자식이란 말이 생겼다. 즉 오랑캐 자식인 게다. 잡혀간 부녀자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난잡한 성문화에 익숙해야 했고 밤거리에서는 부적절한 생활도 마다했다. 이 일은 큰 사회적 문제가 되어 밤이 되면 각자 가정에서 노인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부녀자들을 단속하는 일까지 생겼다.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눈만 내놓고 머리부터 치마를 길게 둘러썼다. 옆에는 물론 감시자가 따라 붙었다. 사극에서 많이 본 모습이 이때부터 생겨난 일이 아닌가 싶다. 환향녀는 결국 멸시의 대상으로 조롱하는 받는 화냥녀가 되었고 더욱 악화되어 화냥년으로 되고 말았다. 호로 자식이 버릇없는 자식을 부르는 단순한 욕설이 아니고 조상을 탓해야 하는 유래가 있었다는 걸 알고 나면 욕도 가려서 해야 될 듯싶다. 욕설과 비방은 지탄의 언어인 만큼 삼가야 한다. 상황에 따라 꾸짖음이 필요한 경우라면 순화된 언어를 구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입에 담기 무서운 욕이 바로 호로 자식과 환양 년이다.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욕설과 비방은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옳은 말과 곧은 행동은 자신의 인격이다. ××를 빼고는 의사 전달이 안 되는가?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 사고로 바꾸어보자. 욕심 많은 이를 탓 할 땐 돈방석에 앉을 위인은 어떨까? 꽤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조상을 탓하고 치욕의 역사를 끄집는 욕설과 자존심까지 건드리는 욕설은 금해야 한다. 무심코 내 뱉은 한마디가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고 조상을 욕되게 할 뿐이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 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방랑시인으로 유명한 난고(蘭皐) 김삿갓은 등용문 이였던 과거 시험 답안지에 자신이 쓴 글이 정답 이였지만 조상을 욕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며 평생을 삿갓 쓴 방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점잖은 체면에 굳이 욕이 필요할 만한 상황이라면 사태를 파악하고 수습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고 조상을 탓하는 욕설은 금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욕도 절대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한국농어촌공사 영북지사 박종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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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 땅~@img!!우리나라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나라가 일본이다. 멀리 역사를 보면, 백제 근초고왕 시절에 우리의 문물과 지식을 넘겨 받을 정도의 미개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사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일본은 선진 외국의 신기술을 일찍 받아들여 호시탐탐 남의 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때 수많은 침략야욕을 보이더니 결국은 한일합방으로 시작하여 36년간의 일제하에서 우리는 핍박과 압박을 받아온 전례가 있다. 끈질긴 조선의 혼과 숭고한 독립투사들의 살신성인 정신에 1945. 8. 15 광복을 맞이하면서, 우리 한민족은 갖은 고난과 역경속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건설한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쪽발이의 근성이 심심하면 되살아나고 있다. 외국의 수백년전 지도를 보아도 한국해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부지기수다. 영월 호야지리 박물관에 소장중인 1748년 프랑스 발행의 중국지도엔 한반도를 COREE로 소개하고, 동해는 한국해로 표기했으며, 1749년 프랑스 보간디의 일본지도 역시 동해를 한국해로 표기했으며, 1772년 영국에서는 동해가 한국의 만이라고 당빌의 아시아 전도에도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프랑스 지도학 역사상 가장큰 영향력을 발휘한 프랑스 수석 지리학자 드릴은 이미 300여년전인 1705년 아시아 지도를 통해 우리나라를 왕국으로 소개하고, 한반도 동쪽 바다를 Mer de Oriantal ou Mer De Coree(동해바다의 한국해)라고 썼다. 이러한 예를 봐서라도 독도는 한국땅 이라는 것을 외국에서도 유명한 지도로 천명한 것인데도 일본은 찬탈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 전 국민은 본노하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며, 어거지 쓰고 있는 일본 쪽바리들의 근성을 작은 것부터 척결해야 할 것이다. 그중 하나로 광복회에서 시작했지만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일본산 제품으로는, 마일드 세븐 담배, 아사히 맥주, 소니 전자제품, 니콘 카메라 등 우리 일상생활 용품에 필요한 일본 제품은 모두다 불매하여 쪽발이의 침략근성을 뿌리 채 뽑아야 할 것이다. 독도는 영원히 우리 땅!! 신철원 1리 이 창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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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생각한다~@img!!해마다 맞이하는 8월이지만 올해는 느낌이 영 찜찜하고 불쾌하다. 경박한 시류와 혼잡한 가치관이 어지럽고, 날씨마저 오락가락 심술을 부려 후덥지근한 터에, 이웃나라까지 얄밉게 구니 국민의 심기가 편치 않다. 오늘의 일본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불과 몇 달전 지진해일로 고생할 때 우리국민이 측은지심을 발휘하여 도와 주었는데, 그 온기가 미쳐 가시기도 전에 섬뜩하게 비수를 들이 밀다니.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나라요 고약한 이웃이다. 만만한 싹을 보았나? 왜구의 노략질로 재미를 보더니, 급기야 임진년에 쳐 들어와 7년간 이 땅을 유린 했었다. 그리고 개화기에는 날강도가 되어 우리국권을 강탈한후, 36년간 온갖 만행을 져질렀었다. 끝없는 허욕과 망상 끝에 원자폭탄의 천벌을 받았으면 정신을 차릴만도 하건만, 제국주의가 사라진 오늘날 까지도 그 간교한 습성을 못 버리고 침략과 강탈의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제 잘못과 죄악에 대하여는 반성이나 사과를 외면 한채, 말장난으로 우롱하면서 얼버무리는 아주 못된 이웃중의 하나가 아마 일본일 것이다. 그 일본이 우리의 8월에 던지는 의미는 결코 잊을수 없는 경각심이다. 1910년 8월29일 한일강제병탄의 치욕이 우리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1945년 8월15일의 광복은 자유와 통일의 기쁨 대신, 분단과 대립의 비극적 결과를 가져 왔는데, 이 모두가 일본의 책임인 것이다. 독도가 우리땅 이란건, 하늘이 두쪽나도 흔들릴 수 없는 우리의 신앙이다. 구태여 지증왕13년(서기512년)조를 거론 하지 않아도, 명백하고 충분한 근거들이 뒷받침 하고 있는 터다. 그런대 왜 독도망발이 계속되고 있는가? 냉철하게 돌이켜 보면, 모든 원인은 우리자신에게 있다. 만만한 싹을 보이니까 일본이 계속 집적대는 것이다. 냉혹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강인한 정신문화의 힘과 튼튼하고 강력한 국력이 국가존립의 필수조건이다. 500년의 조선왕조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멸망 당한것은, 이와같은 자주적 결단능력의 상실과 함께, 시대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왕조의 정신기반인 성리학이, 후반기에 와서는 극단적인 명분론과 주지주의로 변질되어 극심한 공리공론과 당파싸움을 조장하므로서, 국가기강을 좀먹고 정신을 병들게 만들었다. 통치이념의 상실과 지도체제의 붕괴는,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가렴주구, 삼정의 문란, 지식층의 분열과 대립을 불러왔고, 백성들의 시달림과 원성이 가중되어 더욱 깊어진 총체적 병폐현상은, 망국을 앞당긴 가장큰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자주와 자위능력을 갖지못한 상태에서 ‘황제’를 일컫고 ‘제국’을 논한들 무슨 소용인가! 결국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한 이땅은 놀이개 감처럼 처참하게 짓밟히면서, 국모시해의 능욕과 경술국치의 참담한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는 일본군국주의의 치밀한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고, 그들의 집요한 책략은 100여년이 흐른 오늘의 독도망언까지 일관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의 망발은, 우리로 하여금 대오각성과 단결을 촉구하고, 못된 싹의 뿌리를 반드시 도려 내야 한다는 비장한 결의와 거룩한 분노를 일게한다. 정부, 학계, 국민모두가 차분하고 냉정하게 지혜를 모으고 치밀하게 대응해야 한다. 민족만년의 원대한 심정으로, 우리역사와 정체성을 가슴깊이 되 새겨야 한다. 정신문화의 토양을 더욱 두텁게 다지고, 감히 넘 볼수 없도록 자강불식으로 국력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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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문화수련원’ 체험기~@img!!성균관에서 주관하는 ‘전통문화와 예절교육’을 위해 경북영주시의 순흥을 다녀왔다. 순흥은 조선초기에 도호부였는데, 수양대군을 반대한 금성대군이 이곳으로 유배와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면서 폐읍을 당하였던 고장이다. 인근의 부석사를 비롯하여, 선비문화촌과 선비문화수련원, 청소년수련원, 소수박물관, 순흥향교, 금성단, 순흥안씨추원단등 전통역사관련 문화시설들이 밀집해 있다. 특히 조선조 최초의 사액서원(임금이 서원현판을 직접써서 내리고 서원운영을 국가에서 지원함)인 ‘소수서원’은, 순흥출신으로 중국 주자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선생의 높은뜻이 담겨진 유서깊은 곳이다. 조선중엽에 주세붕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안향선생의 수학터에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퇴계 이황선생도 이곳의 관장으로 부임하여,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꿔 사액받게 하는 한편으로 정통유학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한 영향 때문인지, 산간벽촌의 궁벽한 고을임에도 도처에 역사유적이 산재하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절의지향다운 기개와 자부가 대단하였다. 영주시에서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이곳을 한국선비정신의 본고장으로 발전시켜 나가기위해 대대적인 지원을 기울이고 있었다. 선비문화수련원은, 영주시에서 건립한 전통한옥의 인성예절 전문교육기관으로, 남다른 인상과 감회를 주었다. 삼락정단청에 드리워진 연꽃향이 거문고 선율처럼 은은하다. 조양루 솟을대문을 지나 원려문을 들어선다. 작약이 수줍음을 드러낸 안마당을 새악시처럼 밟으며 청백재 대청에 오른다. 사랑채 툇마루에 걸터앉아 멋들어지게 휘어진 기와추녀의 곡선을 올려다보며 옛정취에 취한다. 고즈넉한 옛스러움과 그윽한 풍류는 우리의 넋이요 혼일터. 부족한 듯 하면서도 채움이 있고, 불편한 듯 하면서도 아늑함과 넉넉함을 안겨 주는것은 한옥만의 매력이다. 라디오, TV등 문명의 이기를 생략하고 세상과는 절연한채, 고적한 옛 멋과 가르침으로 자기정재와 묵상에 빠져든다. 일체의 장식이 절제된 거실의 간소함과 단촐함, 그것은 난생처음 경험하는 선비의 삶 이었다. 한옥의 그윽한 품격앞에 물질문명으로 중독된 한없는 욕망과 불만이 얼마나 덧없는 허상인가를 되뇌이기도 했다. 연무가 내려앉은 새벽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그림처럼 어우러진 연화산을 바라보며 도란도란 굽이치는 죽계천변을 산책한다. 저만치 소수서원의 유생들과 퇴계선생을 만난듯 하고, 고루거각의 담장너머로 새벽잠을 깨신 노대감의 헛기침소리가 들리는 듯도 싶다. 이웃집 사립문안의 초가에서는 조반짓기에 바쁜 젊은 아낙의 스치듯 띄우는 미소가 진한여운으로 다가 온듯 했고. 타임머신의 환상을 깬것은, 건너편 취한대 앞에 내려앉은 한쌍의 백로 였다. 오늘날 우리는 심각한 정체성의 혼돈속에 살고 있다. 역사인식의 굴절, 전통문화의 비하와 외면, 예절문화의 실종, 지도층의 도덕성 상실, 지식층의 무감각과 무책임, 방송매체들의 선정성과 무절제 등등. 정신문화의 총체적인 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늦은 감이 많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정신문화의 재건에 힘써야 할것으로 생각한다. ● 크게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인문학분야에 관심과 지원을 늘려야 하고, 전통문화의 계발에 힘을 쏟아야 한다. 한국학연구와 실학의 재조명이 필요하고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우리문화의 정신적 뿌리가 돼온 유학을 친현대적으로 연구발전 시켜야 한다. 유학의 현대적 연구와 생활화는, 우리정신문화의 새로운 정립일뿐 아니라, 현재와 같은 정체성의 혼돈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최고의 처방전이라고 본다. ● 작게는 지방정부차원에서, 향교를 중심으로한 전통문화선양과 예절 및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현재 성균관을 비롯한 각처의 향교에서 다양한 활동을 수행중에있고, 철원향교에서도 처음으로 금년 상반기에 청소년인성교육을 실시한 바 있다. 내년에는 교육관계당국과 협조하여, 체계적으로 청소년인성교육을 확대실시하고 일반인에 대한 품성교육도 실시할 계획인 만큼, 지역주민들의 많은참여와 성원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