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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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img!!김영칠 수필가 사대부국가 조선의 제왕학 교육은 대단히 철저 했는데요. 임금도 매일 한차례 이상씩 신하들의 경연(經筵)을 들어 야만 했고, 특히 왕세자 또는 왕세손은 ‘시강원(侍講院)’이라는 별도의 전담기구를 설치하여 가르쳤지요. 특히 장차 군왕이 될 왕세자를 가르치는 시강관은 역활과 책임이 막중해서, 학문과 인품이 훌륭한 신료나 선비를 골라 뽑았습니다. 오늘은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을 가르친 변계량(卞季良,1369-1430) 선생 말씀을 드려 보고자 합니다. 본관이 밀양인 선생은 자가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으로, 고려말에 태어나 조선개국초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 했지요. 이미 네 살에 고시(古詩)를 외웠고 여섯 살에 한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머리가 뛰어나 열일곱의 약관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구요. 하늘이 낸 문재(文才)라 할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나, 문묘의 비문과 무학대사의 묘비명, 조선의 창업을 노래한 ‘화산별곡’을 지었습니다. 대제학을 20여년간 역임한 대표적인 문형(文衡)으로 수많은 학사들을 길러냈고, 특히 외교문서에 능통하여 명과 왜와의 까다로운 문제를 명쾌하게 풀기도 했지요. 태종은 선생의 학문을 높이 사서 그에게 세자 양녕대군의 교육을 명 하는데요. 그런데 아시다 시피 ‘양녕’이 누구 입니까? 천하의 바람둥이, 장안제일의 한량, 그 누구도 다스릴 수 없는 삐딱한 문제아 였거든요. 사실 양녕은 아버지를 닮아 천성이 호방뇌락 하면서도 학문적인 자질이 출중 하였지요. 태종은 늦게얻은 아들인데다 적자승계의 전통을 확립하고자 하는 욕심에 열한살의 양녕을 왕세자로 봉하는데요. 그러나 아버지의 살육행위에 염증을 느낀데다, 천성적인 자유분망함과 호색증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옆으로 새고 말았습니다. 대군이 학문을 게을리 한다는 사간원의 상소가 빗발치자, 태종은 동궁에 근무하는 내시의 볼기를 치고, 시강관인 변계량을 질책하지요. 그러나 세자의 버릇은 여전해서 심야월장과 궁궐이탈은 보통이고, 서울기생 봉지련, 초궁장, 칠점생, 평양기생 ‘소앵’ 등 맘에드는 여인들과 어울려 기행과 추문을 밥먹듯 일으킵니다. 한참 뒤에는 궁중을 발칵 뒤집는 사건이 또 일어나는데요. 바로 ‘어리사건’. 대신 곽선의 첩 ‘어리’를 양녕이 보쌈을 해서 세자궁으로 뺐어온 겁니다. 이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양녕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조정대신들이 들고 일어나, 세자와 시강관의 탄핵을 요구 하는데요. 이에 난감해진 태종은 선생에게 밀교(密敎)를 내려, “세자가 종묘에 가서 반성하고 맹세하게 하라”고 합니다. 선생이 양녕에게 태종의 뜻을 알리자 양녕 왈, “내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종묘에 고할 반성문을 선생이 지으시오. 종묘에 고하고 나서는 전하께 글을 올리고자 하니 함께 지으시오”. 이렇게 해서 조선왕조 최초로 왕세자가 종묘에서 사죄하는 일이 벌어지는데요. “증손 왕세자 신 이제(李褆, 양녕대군의 이름)는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법도를 무너뜨리고 방종 때문에 예의를 무너 뜨렸으며, 여러번 어버이에게 순종 하지않아 그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였고, 위로는 조종의 덕을 더렵혔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이미 고한 뒤에 지금의 이 말에 변함이 있으면, 조종의 영령들께서는 반드시 벌을 내려 용서하지 마소서”. 양녕은 8가지 조목을 들어 자신의 죄를 고하고 태종에게도 반성문을 제출하는데, 모두 선생이 대신 지은 것 이었습니다. 그러고도 양녕의 버릇은 달라지지 않아서 결국 25세에 ‘폐세자’를 당하는데, 이를 옆에서 말없이 지켜봐야 하는 선생의 마음은 어떠 했을까요?. 스승과 제자의 잘못된 만남, 뒤틀리고 어긋난 운명앞에 한 없는 회한의 눈물을 쏟았는지도 모르겠군요. 태종이 돌아가고 세종이 즉위하자, 선생은 경연관으로 위촉되어 세종에게 학문을 강론했고, 말년에는 다시 왕세자(나중의 문종)의 시강관이 되지요. 양녕대군과 세종, 문종을 연이어 가르쳤으니 가히 당대의 큰 스승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학자로서의 외형적인 영광뒤에는 집안 누이와 조카딸의 음행으로 구설수를 탓고, 주변으로부터 여성학대와 편벽고집의 성품이라고 비판을 받는가 하면, 이혼과 재혼을 여러차례 하는등 불행한 일면도 없지 않았지요. 그럼에도 그가 현달(顯達)의 영예를 누릴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소한 결점을 감싸주고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적극적으로 아껴준, 태종과 세종의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선생이 자손들에게 남긴 ‘가훈’ 한편을 소개 합니다. “인생은 금과 돌이 아니어든/ 소년시절 몇때나 될까?/ 젊어서 노력 아니하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다/ 부지런함과 검소함은 옛사람의 가르침대로 하고/ 형설의 공으로 배우고 높은 학문을 연구하라”.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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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img!!김영칠 수필가 ‘당태종 이세민’과 ‘조선태종 이방원’은 여러모로 닮은 꼴 인데요. 서로간에 700여년의 시공차가 있음에도, ①성(姓)과 묘호(廟號)가 같은 점 ②창업을 주도한 점 ③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통치능력을 갖춘 점 ④당초의 후계자 지명에서는 밀린 점 ⑤대권확보를 위해 형제를 살해 한 점 ⑥외형상 아버지에 대한 효성과 충성심을 간곡하게 견지 한 점 ⑦왕족간의 다툼에 국한되어 일반백성들이 피해를 입거나 원성은 없었다는 점(오히려 건국초의 정치적 필요와 시대배경은,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을 바란면도 있었음). 대충 이 정도로 요약 할수 있겠는데요. 당태종 이세민(李世民,599-649)당태종은 말년에 세차례나 우리 고구려를 침공 했지요.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나중의 안시성 싸움에서는 성주양만춘의 화살에 눈까지 다쳐, 그 후유증으로 50세에 갑니다. 그의 아버지 이연은 수나라 양제와 이종사촌간으로, 그 밑에서 지방경비대장직에 있었던 사람인데요. 아들을 셋 두었는데 첫째인 건성, 둘째인 세민, 셋째는 원길 입니다. 이세민은 둘째 였지만 지모와 책략이 출중하고 군사적 역량이 탁월 하였지요.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 경험을 쌓고, 건국사업에 큰공을 세우구요. 이세민의 성장에 두려움을 느낀 건성과 원길은 합세하여 제거를 도모 합니다. 그러나 사전에 이를 감지한 이세민은, 황제의 정궁으로 통하는 현무문에 매복하고 있다가,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황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을 한꺼번에 살해하지요. 당태종은 찬탈이나 다름없는 행위로 등극 하였지만, 그것을 치유라도 하듯 재위 23년간 뛰어난 치적을 남깁니다. 비록 고구려원정의 실패로 스타일은 구겼지만, 즉위초부터 영토확장에 힘써 북쪽의 돌궐복속과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까지 강역을 넓혀, 동서문화교류의 물꼬를 트지요. 그리고 율령격식(律令格式)을 완비하여 제국의 기반을 다지고, 당을 세계문화의 중심으로 만듭니다. 역사는 이를 ‘정관의 다스림(貞觀之治)’이라 하여, 중국역사상 손꼽히는 걸출한 군주로 평가 하지요. 그가 신하들과 나눈 치국의 요체가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실려 있는데요. 역대 군주들의 필독서인 이 책에는, 최고 통치자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깊은 혜안이 담겨 있어서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조선조의 태종 이방원(李芳遠,1367-1418) 태조 이성계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 아들 여섯과 딸둘, 제1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와는 아들 둘과 딸 하나, 이름이 없는 제2계비와는 딸 둘만 두었는데요. 이방원은 정비소생의 다섯째 이지요. 그는 남다른 지모와 야심으로 처음부터 아버지의 오른팔이 되어 전면에서 활약했지만, 건국후의 논공행상과 세자책봉 과정에서는 철저하게 소외를 당합니다. 정도전등 사대부세력들의 입김과 이태조의 편애로 제1계비의 둘째아들이 세자로 결정되는데, 여기에는 왕자들의 정치참여를 껄끄럽게 여긴 정도전등의 견제가 작용을 하지요. 정도전은 사실상 조선건국의 기획자라 할만큼 해박한 지식과 역량을 갖춘 인물로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왕권이 아닌 신권(臣權)이 강한 유교국가, 사대부국가로 만들겠다는 복안을 처음부터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과는 자존심과 명분론을 내세워 대립각을 세우는가 하면, 왕자들이 갖고있는 사병(私兵)조직을 해체하고 진법훈련에 참가 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 정도전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은, 1398년 8월 26일밤 무력으로 정도전과 남은등을 살해하고 간단히 권력을 잡습니다. 그리고 왕자들은 아버지를 다그쳐서 세자를 다시 정하는데, 이때 이방원은 점잖게 둘째형인 방과에게 양보를 하지요. 연이어 이복동생들을 도성밖에서 살해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태조는 그해 9월에 새 세자에게 양위를 하고 물러나지요. 이를 ‘제1차 왕자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靖社)’라 합니다. 연이어 해가 바뀐 1399년 개경시내 한복판에서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납니다. 넷째 방간과 다섯째 방원간의 골육상쟁에서 이방원이 다시 승리하지요. 태종은 비록 피바람끝에 등극하였지만, 누구보다 사직의 미래를 꿰 뚫고 있는 인물 이었지요. 개혁군주로서 강력한 왕권을 통하여 법통을 다시 세우고, 재위18년간 치국의 기반을 확립했는데요. 특히 세종과 같은 현군을 후계자를 선택한 것은, 태종의 탁월한 지인지감이라 하겠습니다. (김 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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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없이 즐기는 우리 역사 얘기⑰~@img!!김영칠 수필가 오늘날 우리사회는 소통부재에 따른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상대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팽배로 여기저기서 각진 소리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만약에 우리 몸의 내부구조를 이루고있는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이처럼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근간에 어느 서양의 생물학자가, 지금처럼 닫혀있는 학문간의 단절을 심각한 현상으로 지적하면서, 열린학문의 창조성을 제시한바가 있는데요. 자기논리의 고집, 독단적 가치관의 절대화는, 또다른 대립과 파탄을 야기하여 학문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것이라는 경고지요. 인생과 세상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연계작용으로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다양하게 분리되어 있지만, 각각의 역할과 기능이 소통하고 결합하여 전체를 하나같이 작용하는 구조는, 학문을 비롯하여 우리몸과 인간의 모듬살이, 사회와 국가의 운영, 세계와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이원리 위에 놓여있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신라의 원효스님은 중국으로 유학을 가는 도중 산속에서 자다가, 밤에 목이 말라 어느 바가지의 물을 무심코 마셨는데 아침에 보니 해골 이었다나요. 모르고 먹은 물맛은 기가 막혔는데, 알고보니 해골물이라? “그래! 만사는 맘 먹기에 달린거다”. 그리곤 즉시 걸음을 되돌려 깨달음에 이르시고, ‘만법융화(萬法融和)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펼치셨지요.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능히 모든 방면에 다 합당하고, 다르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방면이 한 맛으로 통한다. 다양성의 인정과 융화! 그것은 본래 불교의 기본입장인 동시에, 원효 화쟁논리의 기본전제 이기도 한데요. 막힘이 없이 두루 넘나들어 통하고, 그래서 하나의 큰 물줄기로 모아지고 다스려지는 ‘통섭(統攝)의 이치‘를, 원효스님은 1400여년전에 제시하신 거지요. 원효스님의 가르침은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려태조 왕건의 가장큰 의미는, 후삼국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포용과 융화라 하겠습니다. 미약한 힘으로 가장 나중에 참여 하였지만, 신중과 겸손으로 굴신하여 제왕이 되었지요. 그리고, 곳곳의 백성들을 끌어 안으므로서 빛나는 통일군주가 되었는데요. 그가 무려 스물아홉명의 부인을 둔 것은, 지방호족을 포섭하려는 결혼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삼국의 이질적정서를 포용하여 하나로 만들기 위한 융화전략이기도 했습니다. 서양사에 있어서 로마제국의 위대함은, 외형적인 영토의 방대함이나 문명의 찬란함 이전에, 사해만방을 제국의 시민으로 차별없이 끌어안은 포용의 힘과, 지도자들의 솔선수범 때문 이라는게 사가들의 공통된 지적인데요. 장대함과 예술성을 가미한 건축물, 항구성과 실용성에 바탕한 기반시설, 지방의 특성과 문화를 존중한 관용과 배려, 이런 긍정적 다스림이 다민족의 이해와 참여를 이끌어 냈고, 그래서 유럽의 역사위에는 지금도 제국의 지배 가 자랑스러운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찍이 영국의 처칠수상은 “대영제국의 역사는 BC 55년 가이사르의 도해(渡海)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갈파한바가 있는데요. 지배받았던 역사를 부끄럽게 여기지않는 심리적 바탕에는, 위대한 역사의 창조에 당당히 참여 하였던 높은 긍지가 서려 있는 것 아닐까요. 그것은 유럽여행을 해보면, 곳곳에 남아있는 제국시대의 유물과 유적, 그리고 옹색하고 불편 하지만, 수백 수천년된 가옥에서도 낙천적으로 살고있는 여유에서 찾을수 있지요. 특히 눈에 많이 띄는 것은, 유명한 거리와 이름있는 골목마다, 상징인물들의 동상이 즐비한 것을 볼수 있는데요. 개중에는 독재자, 정복자, 여색을 넘나들었던 예술가, 괴팍한 철학자 등등이 있지요. 저는 그걸 보면서, 그들 국민의 높은 문화적 자부심과 품격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 인물이 다소의 결함은 있더라도, 국가 사회와 미래역사에 끼친 긍정적 기여를 아름답게 여기는 품성 말이지요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눈여겨 보고, 과(過)보다 공(功)을 존중하는 자세, 그런걸 우리는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중국천안문 광장에 가보면, 천안문 중심에 마오쩌둥(毛澤東)의 초상화가 높이 걸려 있는걸 볼수 있는데요. 이걸 덩샤오핑이 주도 했다고 하네요. ‘덩’은 대장정 1세대의 유공자 임에도, 문화혁명 과정에서 ‘마오’에게 가혹한 배척과 구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덩이 오뚜기처럼 살아나 개혁개방을 주도하면서, 전인대에서 분명하게 ‘공7과3’의 결론을 내리지요. “중국을 이룩한 마오의 공은 그의 과오를 덮고도 남는다”. 박해 받았던 입장 임에도, 대국적인 안목으로 상대를 인정하고 평가한 덩의 자세는, 우리에게도 시사 하는바가 많다고 생각 합니다.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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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img!!김영칠 수필가 지난번에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말씀을 잠깐 드렸는데요. ‘동북공정’이란, 동북쪽의 역사를 중국화해서 근거와 명분을 만들고, 지배력을 강화내지 영속화하려는 원대한 책략이지요. 과거 만주와 요동일대에서 이루어진 고조선,고구려, 발해등 우리역사를 송두리째 중국의 지방역사로 둔갑시키고 예속화 하려는 겁니다. 우리입장에서는 우리역사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 인데요. 그런데 중국정부가 추진하는 역사침탈과 왜곡은, 동북공정을 비롯하여 다른 분야에서도 광범위하고 심도있게 진행중이란 점에 심각성이 있지요. 중국정부는 1986년부터 2016년까지 대략 반세기에 걸쳐, 주변지역의 역사 예속화사업을 추진중에 있는데, ⓵1996년의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⓶2002년의 동북공정(東北工程) ⓷2002년의 서북공정(西北工程) ⓸1986년의 서남공정(西南工程)등 네 분야입니다. ‘하상주단대공정’은, 중화민족의 원뿌리인 ‘하상주’ 세나라의 역사를 정립하여 중화사상을 강화하는 것. ‘동북공정은’,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을 겨냥한 종속화. ‘서북공정’은, 실크로드를 중심으로한 신강지역등의 고착화. ‘서남공정’은, 티베트.사천성.운남성등의 소수민족에 대한 지배력 강화와 경제개발 이지요. 중국은 우리나라의 약 50배에 이르는 거대한 면적을 갖고 있는데, ‘하상주’시기에는 황하,양자강 일대를 중심으로한 중원지역에 국한 하였다가, 진시황과 한무제를 거쳐 청대의 강희,건륭제의 팽창정책으로 오늘날에 이르게 된건대요. 그들이 주장하는 ‘중화주의(中華主義)’란 사실은, 중원중심의 순수 한족문화만을 지칭하는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의 표방이었고, 주변지역은 오랫동안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으로 비하내지 차별화 해왔지요.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개혁개방이 추진되면서 종래의 ‘대한족주의’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대한족주의는 배타적 민족주의요, 배타적 패권주의여서 개혁,개방정책에 걸림돌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궁리해낸 이론이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인데요. 이는 종전까지 홀대해 오던 주변 소수민족을 포용하여, 하나의 중국으로 용해 하겠다는 뜻인데, 그 꿍꿍이 속에는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소급해서 해석하는 무서운 전략이 숨어 있는거지요. 중국인들이 말하는 ‘중국사’는, ‘현재 중국 영토안에 있었던 한족을 포함한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는 곧 ’중국사’란 주장입니다. 그들이 폄하했던 변방민족의 역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한족왕조를 멸망시켰던 거란족(金),몽고족(元),만주족(淸)등의 역사를, 모두 중국사속에 편입해 버린거지요. 그리고 주변 이민족들과의 전쟁을 ‘중국내부의 분쟁’이지, 외국과의 전쟁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는겁니다.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도 ‘민족내부의 분쟁’이라는 주장이구요. 중국의 역사공정은 중화주의의 정체성확립을 위해 정부주도로 추진중에 있다는 점에서 심각 할수밖에 없고, 사실상 속수무책인 우리의 한계와 비애가 뒤따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팽창정책과 대국화는 매우 오랜 연원이 깔려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사상적 뿌리는 중국역사를 최초로 정립한 사마천의 ‘사기’에 닿아 있다고 볼수 있는데요. 기원전 2세기 무렵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던 당시는, 중국역사상 진시황 다음으로 강력한 정복군주인 ‘한무제’가, 북방의 흉노와 서역정벌로 유럽민족의 대이동을 야기 할만큼 영토확장에 힘썼고, 주변민족의 예속화사업을 통해 ‘대중화주의’의 발판을 마련했지요. 사마천은 그러한 시대적 감각으로, 까마득한 ‘하상주’3대의 전설을 정사로 기록하였는데, 오늘날의 ‘역사공정’은 그런 맥락위에 있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중국당국은 ‘하상주단대공정’을 통하여 ‘하나라’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2070년’까지 끌어 올려, 종래의 중국사 기원인 ‘기원전841년’보다 무려 1229년이나 소급시켰는데요. 고대사의 공백부분을 확실하게 채워 넣으므로서, 한족중심의 역사관을 확립하겠다는 것이지요. 이러다간 자칫하면 우리민족의 역사와 뿌리가, 중국이라는 블랙홀속으로 함몰되어 버리는건 아닌지 걱정 되네요. 요즘같은 역사 경시풍토가 개탄 스럽기도 하구요.(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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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⑮~@img!!김영칠 수필가 ‘구비쳐 흘러오는 압록강 위에/뗏노래 가락마다 구슬프구나/강건너 만주벌은 고구려 옛땅/줄어든 이지도를 누가 그렸나’. 노산 이은상 선생의 찬가 ‘조국강산’인데요. 수년전에 창춘과 하얼빈등 중국의 만주지역 일부를 여행 한적이 있습니다. 마지막황제 푸이가 살았던 위만황궁(僞滿皇宮), 일본군의 생체실험으로 악명높은 731부대유적, 관동군사령부 옛건물, 안중근의사의 의거현장인 하얼빈역등을 둘러 보았는데요. 특히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찾았을때의 감회를 지금도 잊을수가 없습니다. 만주대륙을 주름잡던 우리의 영광이, 이제는 남의 땅에서 남의 역사로 둔갑되는 가슴저린 회한 말입니다. 잃어버린 땅, 찾을 수 없는 과거, 역사왜곡의 치욕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약자의 서글픔. 연암 박지원선생의 말씀처럼 ‘대성통곡’을 하고픈 서러움이 밀물처럼 다가 왔었지요. 광개토대왕비에서 느끼는 통절한 회한과 절박한 비애는 다음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일제에 의한 비문조작이고, 또 하나는 중국정부에 의한 고구려역사의 예속화 인데요. 결과적으로 우리역사의 침탈과 왜곡이란 점에서 맥락을 같이하지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서기391-413)의 정식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崗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입니다. 18세에 즉위하여 재위 22년동안,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 정복군주인지라, 이런 굉장한 호칭이 붙여 진건데요. 그러나 이 비는 찬란한 명예에 걸맞지 않게,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기구한 설움을 당해 왔습니다. 건립된지 254년만에 고구려가 당나라에 패하여 방대한 영토를 잃었고, 그후 1,400여년의 격동속에 만주는 말갈, 여진, 몽골등 여러종족들이 설치는 어지러운 무대가 되었지요. 대왕의 비석도 철저하게 잊혀진채 관심밖으로 방치 되었구요. 그러던중 1880년대에 대륙침략의 야욕을 품은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만주지역을 비밀답사 하는 과정에서 이 비를 발견하는데, 비극은 여기서 비롯 됩니다. 비문은 모두 1,802자인데 오랜세월의 경과로 글자의 마모가 심한 상태지요. 그래서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많은데요. 그중 쟁점은 일부내용의 ‘왜(倭,일본)’와 ‘고구려’의 주어를 둘러싼 논란입니다. 일본군부는 비밀리에 해독을 진행한후 “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왜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왜는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발표를 하지요. 이에 대하여 우리학자들은, “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신묘년에 왜가 왔으므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구요. 일본군부가 저들 유리하게 몇 자구를 조작해서 역사를 왜곡 했다는게 우리의 주장 인데요. 물론 이문제는 전문역사학자들의 소관이긴 하지만, 상식적으로 납득 않가는게 많습니다. 아니! 비문의 주인공이 누군데, ‘왜’가 뚱딴지 같이 끼어들어 주인공으로 둔갑하느냐 이겁니다. 이게 일제의 간악한 농간질 아니겠어요. 과거 일제는 한결같이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의 남쪽일부를 지배했었다.’는 주장을 펼쳐 왔지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인데요. 임나는 옛 가야지방으로 지금의 김해지역인데, 가야는 철기생산으로 번성했던 고대의 부족국가 였지요. 일본은 가야의 월등한 철기문화를 전수받고, 특히 백제와는 한 집안처럼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선진문물을 받아 들일 만큼, 고대 일본의 한반도 의존율은 절대적 이었지요. 우리를 배우러 왕래 한 것을 가증스럽게 지배했다고 조작하는거 아니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문약에 빠져 나라를 잃고 제것을 지키지 못한 결과, 침략자들에 의한 우리역사의 파괴와 날조왜곡, 폄하조롱을 받았던 것이니 한심 한거지요. 일제의 비문조작이 100여년전 과거라면, 현재 우리 눈앞에서 진행중인 중국정부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단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역사침탈이자 왜곡이 아닐수 없는데요.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의 입장에서, 현재 거느린 55개 소수민족의 과거역사 모두를, 자기네 역사로 간주하는 거지요. ‘현재의 중국영토안에 있었던 과거 모든 민족의 역사는 곧 중국역사’라는 겁니다. 이 논리대로 한다면,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와 발해까지도 중국사가 되는 거고, 더 넓게는 문화적예속을 받았던 백제와 신라도 그 범주에 든다는 가정이 제기될 수도 있는데요. 비문조작보다 더 섬뜩합니다.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않타깝기만 하네요. (김 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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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⑭~@img!!김영칠 수필가 사람에 의한 사람의 지배는 오랜역사를 통하여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습니다. 왕조시대에는 한사람의 임금이 죽을때까지 권력을 누렸다면, 오늘날은 국민의 손으로 뽑힌 지도자가 주어진 기간 만큼만 나라를 다스립니다. 국가 최고 지도자의 자질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시대와 역사가 달라질수 있는데요. 민주주의 세상에서는 지도자가 맘에 않들면 선거로 갈아치우면 되지만, 왕조시대에는 함부로 바꿀수가 없어서 잘못된 임금을 만나면 나라가 시끄럽고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지요. 원래 임금자리는 신하중에서 유능한 자에게 물려주는 전통으로 출발을 했었대요.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를 보면, 요(堯)는 ‘내아들 단주는 천하를 물려받기에 자질이 부족하다’ 면서, 순(舜)에게 양위하였고, 순은 아들이 있음에도 역량이 부족하자 ‘한사람을 이롭게 하자고, 천하가 손해 볼수는 없지 않느냐’ 하고는, 우(禹)에게 임금자리를 넘겼지요. 이와같이 훌륭한 인재에게 임금자리 물려주는 것을 선양(禪讓)이라고 합니다. 선양제도가 무너진 것은, 훗날 동일왕통을 위한 부자세습의 전통으로 바뀌면서 비롯된 것이지요. 적자승계가 왕조의 법통인 종법(宗法)으로 자리잡은건 2천수백년전 주나라 때라 합니다. 문제는 적자가 훌륭하면 괜찮은데 모자랄 경우는 골치 아픈거지요. 좋은 조건임에도 암군(暗君)일 때는 나라가 헝클어지고, 나쁜환경이라도 현군(賢君)이 다스리면 빛나게 달라질수 있는건, 전적으로 임금의 능력문제라 하겠습니다. 나라와 백성들의 행,불행이 한 임금의 자질에 의해 좌우되고, 한 시대의 발전과 역사의 퇴보가 극명하게 갈려지기도 했는데요. 이런 사례를 우리는 연산군과 정조임금 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두분은 비극적인 부모의 불행과 거칠고 드센 사대부세력의 알력이라는 환경적공통점이 있었음에도, 개인적자질과 인성도야의 방법이 달랐고, 세상을 보는 인생관과 파고를 헤쳐나간 방향이 전혀 달랐습니다. 극과 극이라 할까요.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신씨가 사약으로 죽은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가 나중에 고변에 의해 알게 되었지만, 정조는 어린 세손시절에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죽는 것을 직접 보았지요. 연산군은 왕조 건국초반의 신선함과 강건함, 아버지성종의 덕정과 융합으로 안정된 통치기반을 물려 받았음에도, 간신배들의 농간에 휘둘려 이성을 잃고 실정한 나머지 반정으로 쫓겨났습니다. 이에 반해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장기집권과 독선, 부패와 이완의 말기적 증상, 극심한 당쟁과 외척들의 등살등, 생명의 위협속에서도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여 훌륭한 치적을 남겼습니다. 비극을 직접 당하였음에도 학문연마와 수양을 통하여, 인격완성과 덕을 쌓아 백성사랑의 아름다운 향기를 남긴 정조. 그런가 하면 젊은날부터 학문을 싫어하고 놀기를 즐기면서 무례방자 하였고, 남의 참소를 확대해석하여 무자비한 적개심으로 무고한 살육과 패륜을 서슴치 않은 희대의 폭군 연산군. 두 임금의 일생이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러고 보면 폭군과 성군의 갈림길은 자질과 노력인 것 같군요. 왕세자에 대한 제왕학 교육은 법도가 엄중하고 철저 하였음에도, 당사자의 자질이 함량미달 일 경우는 어쩔도리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성종도 연산군을 세자로 정해놓고 많은 근심을 했다 합니다. 그러나 늦게얻은 아들인데다 적자니 어쩔수 없었다구요.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졸지에 죽였지만, 통열한 반성과 측은함으로 어린세손을 금지옥엽처럼 가르쳤습니다. 어린세손은 호랑이같은 할아버지 밑에서 숨소리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근신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덕행을 쌓는 공부에 매달렸지요. 그러나 어린 맘에 깃든 슬픈 가족사가 얼마나 큰 그림자를 지웠을까요? 인간적 비애와 괴로움을 참고 견디면서 때를 기다린 정조의 자세는, 인간 이산(李蒜, 정조의 이름)의 그릇이 얼마나 크고 깊은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그의 치세는 우리역사에서 ‘문예부흥시대’라 부를만큼 찬란한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재위24년동안 가장많은 순시와 의견수렴을 통하여 백성사랑을 실천했고, 학문장려와 국방강화에 힘썼습니다. 가장 어려운 시대를 제일 슬기롭고 영명하게 다스렸던 ‘참 지도자’의 모습을 예서 봅니다.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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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⑬~@img!!김영칠 수필가 지금부터 103년전인 1909년 10월26일, 우리 안중근의사가 일본의 이등박문을 통쾌하게 응징 하였는데요. 안의사가 일본법정에서 주장한 이등박문의 죄목은 무려 열다섯가지 입니다. 첫째, 우리국모를 시해한죄, 둘째, 대한황제를 폐위시킨 죄, 셋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죄 등등. 이등박문의 죄악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그의 간악한 책략으로 우리가 입은 가장 큰 정신적 피해의 하나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민족은 당파싸움이나 하고, 자립심도 없어 중국에 기대사는 숙명. 기질적으로 우매하고 열등하여 남의 지배를 받아야하는 체념적인 패배의식이 식민사관 인데요. 일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간교하고 비열하게도, 우리역사를 은연중에 자조적으로 비하하도록 책동 한거지요. 그 원조가 이등박문이라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요?. 식민사관의 단골메뉴로 제시된 사례가 당쟁(黨爭)과 사화(士禍,사림들의 희생)입니다. 어느 원로지도자 한분은 조선조 당쟁사를 보고 ‘차라리 불살라버리고 싶은 역사’라고 비분강개하기도 했습니다만, 혹시 식민사관의 교육영향 때문은 아니신지?. 당쟁과 사화를 비호하고 미화하려는 뜻이 아니라, 긴 역사의 흐름에서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지배세력내부의 갈등의 일환이 아닐는지. 왕권과 신권, 신권과 신권간의 명분과 이념대결, 정책다툼의 개념으로 본다면, 교활한 야욕달성을 위해 툭하면 칼바람을 일으켰던 일본 무사집단의 하극상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거지요. 역사의 안목을 객관적으로 잡고 타임머신을 타 보신다면, 우리역사는 참으로 끈질기고 치열하고 장대하게 발전해 왔음을 발견 하실수 있는데요. 누가 뭐라해도 우리역사는 지정학적인 여건을 슬기롭게 극복한, 주관과 이념이 뚜렸한 긍지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의 역사만 봐도 고구려705년, 백제678년, 신라992년, 고려는 475년, 조선조는 519년. 일본이나 중국을 비롯하여 세계사에서 단일왕조로 400년이상의 수명인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지요. 긍정적 관점과 객관적 비판의식으로 조선조의 ‘4대사화’를 보실까요. 조선조는 근본적으로 유교국가 였지요. 나라운영과 백성을 다스리는 기본구도가 유학의 가르침위에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문치주의’를 표방해서 학문을 장려하고 글을 가르쳤습니다. 인격과 학문을 닦아야 벼슬을 할수 있고 세상에 나갈수 있었지요. 설령 산림에 은거해 있으면서 벼슬은 못해도, 학문적인 자신감으로 세상에 큰 영향을 준 분들이 많습니다. 선비들은 뚜렸한 학문적주관을 사생관으로 갖고 있어서, 어긋나는 논리나 행위에는 목숨을 거는 각오로 대처했지요. 조선조의 당쟁이나 사화의 배경에는, 학자와 관료등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층과 지배세력간의 치열한 가치관논쟁과, 권력을 둘러싼 역동적인 다툼의 맥락이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 무오사화(戊午士禍,1498 연산군4년) - 연산군이 생모의 죽음을 알고나서 훈신과 사림을 모두눌러 왕 권강화를 시도 하는데요. 이때 사림의 공격을 받고있던 이극돈등이, 사림출신의 사관 김일손이 지은 사 초(史草)를 문제삼아 사림파를 제거하고 피해를 입힌 사건. ●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연산군10년) - 연산군은 생모의 폐비사사(廢妃賜死)에 성종때부터 권력을 누려온 훈신들이 개입돼 있는 것을 알고, 이를 기화로 남아있던 훈신과 사림을 모두 제거한 사건. ●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중종14년) - 중종을 옹립한 반정공신들의 횡포로 사림과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중종은 조광조등 참신한 사림출신 선비를 등용하지요. 조광조는 반정공신들의 책록삭제와 도 학정치를 건의 하는등, 급격하고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훈구파가 조광조일파에 게 누명을 씌워 제거한 사건. 조광조는 억울하게 죽었지만, 사후에 문묘에 모셔진 기묘명현이지요. ●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명종즉위년) - 중종의 아들인 인종이 재위8개월 만에 돌아가고, 인종의 배 다른 동생인 어린명종이 즉위하는데, 두임금의 주위에서 권력을 잡았던 외척들간의 권력투쟁. 약70년간 네개의 큰 사화를 통하여 희생과 진통도 컷지만, 갈등과 각성의 와중에서 명망있는 지식인들이 길러졌고, 이들이 사회와 국가의 중심세력으로 조선조 후반기를 든든하게 버텨주었지요. 어려운 시대를 이끌었던 사림의 창조적 비판정신이 오늘의 우리에게 이어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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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⑫~@img!!김영칠 수필가 “아이는 어릴적에 단단히 가르쳐야 하고, 며느리는 처음 들어 왔을때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敎兒嬰孩 敎婦初來,교아영해 교부초래). 아이를 사랑하거든 매를 많이 주고, 아이를 미워하거든 먹는 것을 많이 주라(憐兒多與棒 憎兒多與食,련아다여봉 증아다여식)”는 옛말씀이 있는데요. 요즘 문제가 되고있는 학교폭력사태를 보면서, 걱정이 많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복잡한 현대생활과 어지러운 교육환경으로 인한 문제인 만큼, 효과적으로 대처하기는 쉽지 않겠으나, 인간교육이란 관점에서 보면 문제의 핵심은 분명하다는 생각을 갖는데요. 나름대로의 견해를 제시해 보면, 오늘날의 문제는, 그동안 기본을 생략하고 목적만을 추구한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는지요? 기본교육이란게, 당초부터 올바르고 확실하게 틀 잡아 주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오랜 전통교육방식 이었음에도, 그만 서양방식에 취하여 잊어버렸던 거지요. 우리전통교육은, 밥상머리교육, 인성과 예절교육, 참여와 체험을 통한 학습과 학문연마등, 쉽고 간단하면서도 기본을 중시한 실질적 교육 이었거든요. 방황하는 현대교육의 와중에서, 전통교육방식의 절충적적용은 또다른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이 아닐까요? 우리선조들은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목적과 절차를 절대적으로 중요시 했지요. 예를 들면, 사람의 일생을 자기수련과 연마의 단계인 ‘수기(修己)’와, 세상다스림 단계인 ‘치인(治人)’의 두부분으로 나누고 전과정을 다시 팔조목(八條目)으로 구분해서, 매 분야를 확실하게 터득하도록 아주 엄격하게 가르쳤는데요. 팔조목은 수기가 5조목, 치인이 3조목인데 인성교육에 해당하는 수기는, 격물(格物,사물의 이치를 밝힘),치지(致知,앎을 투철히 함),성의(誠意,뜻을 성실히 함),정심(正心,마음을 바르게 함),수신(修身,몸을 닦음)이고, 세상에 나아가는 치인은, 제가(齊家,집안을 바로잡음),치국(治國,나라를 다스림),평천하(平天下,천하를 평화롭게 함)인데요. 기본적인 마음가짐과 자세를 확립한 뒤라야, 남 앞에 나설수 있다는 것이 옛선비들의 참모습 이었지요. 교육의 절반을 넘는 가정교육은, 일상생활을 통하여 반듯한 습관을 기르도록 가르쳤구요. 특히 밥상머리교육은, 인성과 예절의 첫걸음으로 여겨서, 밥상앞에 앉는자세, 숟가락 잡는법, 밥먹는 자세, 식구들과의 어울림과 예절등, 사소한 사항까지 찬찬하고 분명하게 일렀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점은 반드시 고치도록 하되, 말을 듣지 않으면 종아리를 치고 체벌을 가하는등, 매서운 훈도가 따랐지요. 아버지의 엄한 훈계 한마디, 어머니의 따끔한 회초리 한대의 기억이 그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하였구요. 이와함께 우리전통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본받고 따라 배울 수 있는 사표(師表)를 명시했습니다. 지방의 향교나 서울의 성균관에는, 글공부방인 명륜당과 성현을 모신 문묘가 같은 공간에 배치되어 있는데요. 학문연마와 함께, 존경하는 성현을 따라 배우는 인격도야의 훈련이, 일상생활속에 자연스럽게 이루어 지는 것 이지요. 향교에 모셔져 있는 성현은 공자, 맹자를 비롯한 중국측 성현 일곱분과, ‘동국18현(東國十八賢)’이라하여 우리나라의 선현 열여덟분등 모두 스물다섯분 인데요. 이두를 만든 신라의 설총,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처음 들여온 고려의 안향, 선죽교에서 돌아간 정몽주, 조선 성리학의 양대산맥을 이룬 영남학파의 이황과 기호학파의 이이, 효종을 도와 북벌을 추진한 송시열,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7백의사와 함께 순국한 조헌선생등은, 우리가 너무 잘아는 분들이지요. 이황과 이이선생은 화폐인물로 모실만큼 오늘날도 존경을 하고 있구요. 문묘배향이 되자면, 반드시 다음 세가지 조건을 완비하여야 했답니다. 대학자로서 학문에 대한 심오한 연구와 이론의 독창성을 갖출것. 성인과 다름없는 도덕적 실천과 인격적으로 흠결이 없을것. 학문적 업적이 나라의 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남길것. 그래서 짧게는 40-50년, 길게는 200-300년의 장구한 세월을 두고, 철저한 검증과 심사를 거쳤구요. 최종심사를 거쳐 임금께 상신이 되더라도, 임금님은 좀처럼 재가를 하지 않았대요. 임금이 머리를 숙이는 곳은, 왕실사당인 종묘와 성현을 모신 문묘뿐이고, 불천위(不遷位)라고 해서 한번 결정되면 영구히 모시는 것이므로, 최종결정의 책임에 대한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 한 것 이지요. 밥상머리에서 시작하여 성실하게 몸을 닦고 경건한 마음과 공경의 자세로 추구한 철저한 인간교육, 성현을 사표로 정하여 매진한 드높은 학문자세, 충서(忠恕)와 절의(節義)의 대쪽같은 선비정신은, 곧 우리의 정체성이기도 한데요. 그 올곧은 얼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몸속에 살아있는 것 아닐까요.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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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⑪~@img!!김영칠 수필가 새해벽두에는 밝은 마음으로 덕담을 나누면서 시작하는게 우리풍속인데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배려와 관용으로 우리사회가 튼실하게 발전했으면 하는 맘 간절하네요. 서로믿고 원칙이 서고 대의명분이 존중받고 그리고, 긴 시각으로 미래와 역사를 바라 볼줄아는 풍토가 이루어 졌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욕심을 부린다고 얻을수 있는것도 아니고, 조급하게 서두른다고 빨리 되는것도 아니니, 인생과 세상을 비운마음으로 대하고, ‘느림의 미학(美學)’을 즐기는 심정으로 사는것도 삶의 지혜가 아닐는지요. 눈덮인 산하에 낙낙장송의 푸르름이 고고한 희망을 약속하는 년초입니다. 잠시 한편의 고전으로 도란도란 깊은밤을 나누면서 시원한 동치미국수를 즐기는 낭만은 어떨까요? 오늘은 역사에 기록된 춘추대의(春秋大義)의 아름다운 얘기 몇가지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비록 중국의 사례이긴 합니다만, 천하공의에 순응한 대의명분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원한가를 다음 얘기에서 확인 할수 있는데요. 주나라의 주공단과, 촉한의 ‘승상 제갈량’, 청나라의 ‘예친왕 도르곤’입니다. ● ‘주공단(周公旦)’은, 아버지 문왕과 형인 무왕을 도와 주나라(BC1046-BC256) 를 건국한 성인이지요. 무왕이 어린 아들을 두고 죽자, 조카성왕의 섭정으로 7년간 나라를 다스리면서 주나라의 기초를 닦았지요. 은나라의 유민을 받아들여 정착시키고, 예악창제와 전장(典章)제도를 정리하는 한편, 중국역사상 최초로 봉건세습제를 제도화하여 경세치국의 메커니즘을 구축하였지요. 그리고 성왕이 장성하자 대권을 조카에게 넘겨주고 물러났습니다. 그당시 까지만 해도 왕위계승에 대한 원칙이 없었고, 또 실권을 주공단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욕심만 내면 얼마든지 왕위를 차지할수 있었지만, 주공단은 마음을 비운 사람이었지요. 공자는 주공단의 올바름과 떳떳함을 이상정치의 표본으로 그렸고, 유교형성의 밑거름으로 삼았습니다. ● 촉한(蜀漢,AD221-263)의 ‘제갈량(諸葛亮)’은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지요. 그는 유비현덕의 삼고초려(三顧草廬)로 27세에 세상을 나왔습니다. 일찍이 초야에 묻혀 있을때부터 천하삼분계의 융중대책(隆中對策)을 마련하고 있다가, 주군을 만나자 이를 실천에 옮기게 되는데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비가 중도에 죽는데, 임종전에 ‘아들 유선(劉禪)을 부탁한다. 유충하고 우매한 점도 많으니, 사직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대가 유선을 대신 해도 좋다’고 유언하지요. 천하 삼국중 가장 취약한 형세의 촉한으로서는 국내외로 어려움이 컸지만, 제갈량은 딴맘 먹지않고 진충보국을 다 합니다. 그의 충정은 중원정벌을 떠나면서 후주유선에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에 잘 나타나 있는데요. 출사표를 읽고 울지않은 이가 없었다 할만큼 천하명문이지요.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로 남양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부지하려 하였으나, 선제께서 몸소 세 번씩이나 초려를 찾으셔서 당세의 일을 하문하시니, 신은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몸을 바치리라 결심하고 그 뜻에 응 하였사 옵니다...’ 제갈량은 사실상 약소한 제국의 실패한 재상이었음에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중심인물로서 특출하게 부각되고 있는데요. 그것은 시종일관 보여준 충성심과 의리, 절조와 기개, 뛰어난 기략과 지혜로 원칙과 대도를 걸었기 때문에, 역사를 엄정하게 기술하는 춘추필법(春秋筆法)에서는 그를 으뜸인물로 평가하지요. ● 청나라(AD1616-1912)의 ‘예친왕도르곤’ 입니다. 청태조 누루하치는 모두 열여섯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여덟째인 2대황제 태종과 열네번째인 도르곤이 가장 영특 했지요. 1643년 태종이 어린아들을 남기고 급서하는데, 귀족과 대신들이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하자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여섯 살의 어린조카를 강력하게 추천 하지요. 그리고 황부의 섭정왕으로 3대 순치제를 도와 건국초반을 다집니다.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가, 명나라의 최후항복을 받아 천하통일을 완성하구요. 그래서 순치제를 이어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연결되는 이른바 ‘강건성세’의 번영을 이룩하지요. 도르곤이 대권의 야심을 접도록 만든 것은, 태종의 계비(季妃,두번째 부인)이자 순치제의 모후인 효장문황후와 도르곤의 간절한 사랑이 크게 작용했대요. 문황후는 본래 도르곤의 연인이었는데, 태종이 동생의 애인을 가로챈 거고, 도르곤은 형이 죽은후에 그 여인과 다시 만나고... 참 희한하고 복잡하군요. 인간사 재미 있네요.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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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img!!김영칠 수필가 임진년(壬辰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제왕의 신성한 덕을 갖춘 용띠해 인 만큼, 영험한 품격과 진중한 자세로 나라발전이 이루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독자제현의 댁내에도 평강과 만복이 충만 하시길 빕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임진년의 지난역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420년전인 1592년의 임진년 으로부터 올해까지 여덟 번의 육갑을 혜아려 보면, 우리민족은 참으로 장대한 역사의 물결을 혜쳐 왔습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후유증, 청과의 다툼과 백두산 정계비, 당쟁과 탕평책, 천주교 확산과 세도정치, 서구열강의 침탈, 그리고 6.25의 참화등. 그러고 보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마음 편했던 적이 한번도 없었군요. 이제 또다시 임진년을 맞습니다. 우리는 60년전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세계에 우뚝한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분단의 비극은 상존하고, 대립과 갈등, 불신은 더 깊어지는 양상입니다. 시대조류는 격랑처럼 밀려들고, 주위환경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속으로 빠져 드는데, 우리사회는 방향타를 잡아주는 선장이 없는 듯 불안하기만 하구요. 소통부재,양극화의 심화, 철면피와 도덕불감증, 이념대립, 경박한 풍조의 범람으로 어지럽습니다. 원로가 없고 중심이 없는 사회, 국가대의를 밝혀주는 명분과 사명감이 실종된 상실의 시대를 살고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런때 일수록 지난역사를 되돌아보고, 비상한 깨달음을 얻어야 할것 같군요. 현실상황과 미래역사를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살피는 지혜, 창조적 파괴를 통한 재탄생의 결단,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대전환이 시급한것 같구요. 흔히들 최악의 위기를 “백척간두”라고 합니다만, 우리는 임진왜란을 절체절명의 국가위기로 배웠지요. 왜란 7년전쟁중 특히 1597년 9월의 “명량해전(鳴梁海戰)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이 싸움은 어쩌면 건곤일척(乾坤一擲)으로 천하를 겨루었던 항우의 침선파부(沈船破釜)나, 한신의 배수진(背水陣)보다 더한 비장함이 있고, 그런 점에서 우리민족의 근기와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감투정신의 백미가 아닐까 합니다. 명량해전 직전의 상황은, 상상을 뛰어넘는 악조건 이었지요. 이충무공이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힌것이 1597.3.4.일. 후임통제사 원균이 칠천량해전의 참패로 160여척의 대함대를 모두 잃고, 그 자신도 죽은 것은 같은해 7월16일. 우리해군은 완전히 궤멸되어 재기불능한 상태에 있었고, 남해를 제패한 왜군은 본격적으로 서해진출을 도모하려는 숨가뿐 순간 이었지요. 이충무공은 죽음직전에, 대신 정탁(鄭琢,1526-1605)의 구명상소로 28일만에 풀려나 백의종군중 이었구요. 이에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동년7월23일 이충무공을 통제사에 다시 기용하지요. 공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피시켰던 전함12척을 인수하여 전력을 보강 한후, 숨돌릴 사이도 없이 그해 9월16일 서해로 진출하려는 왜적함대를 명량해협에서 격파하지요. 왜적은 133척중 주력31척을 잃고, 나머지도 지리멸열 패주 하였구요. 최악의 제로상태에서 불과 60일만에 이룬 대첩의 쾌거. 명량대첩의 요인은, ‘울돌목’의 물길을 혜아린 이충무공의 뛰어난 전략과 지혜, 집중과 기민의 탁월한 군사운용, 그리고 국가위난앞에 모든걸 걸겠다고 하는, 최고장수다운 책임감과 희생정신등이 총체적으로 응결된 결과라 하겠습니다. 지도자 한사람의 능력여하에 따라, 역사는 극과 극으로 달라질수 있다는 가르침 인데요. 명량해전에 임할 당시의 이충무공은,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 백의종군중에 어머니를 잃은 불효의 자책등으로 인간적인 번뇌가 깊었음에도, 시종일관 확고한 충성심, 고고하고 강인한 품격, 추상같은 군령으로 감격적인 승리를 이룩하였지요. 이충무공이 명량해전 전날인 1597.9.15일저녁, 휘하 장병들에게 내린 훈시는 다음과 같이 결연하고 지엄 합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김영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