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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⑨~@img!!김 영칠 수필가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하다 돌아간 분들을 어떻게 예우해야 할까요? 국가의 품격, 나라의 정체성, 국민의 자부심과 관련된 문제라고 봅니다만, 우리는 지난역사에서 많은걸 배울수 있지요. 왕조시대의 ‘시호(諡號)제도’는 국가대의의 상징이었습니다. 학문과 치세에서 큰 업적을 남긴 경세가를 추증(追贈)하여 문묘에 배향 한다든지, 국가위난시에 몸을 바친 장군을 만인지상의 품계로 올려서 만세사표로 받드는 일이 치세의 으뜸 이었지요. 충현사업(忠顯事業)은, 곧 국가의 정신이자 중심가치 이니까요. 시호는 원칙적으로 종친과 문무관중에서 정2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수여했는데, 뒤에는 범위가 확대되어 제학(提學)이나 유현(儒賢) 절신(節臣)등은 정2품이 못되어도 시호를 내린 사례가 있지요. 문관의 경우는 문자(文字)를, 무관은 충자(忠字)를 가장 선호했고, 특히 무관은 ‘충무(忠武)’를 으뜸으로 쳤는데요. 충무공하면 언뜻 이순신장군을 떠올리지만, 사실 우리역사에서 ‘충무공’의 시호를 갖고계신 이들은 대략 열분이 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때의 지용수(池龍壽)공, 박병묵(朴炳默)공, 최필달(崔必達)공, 조선조의 조영무(趙英茂)공, 남이(南怡)장군, 이준(李浚)공, 이순신(李舜臣)장군, 김시민(金時敏)장군, 이수일(李守一)공, 정충신(鄭忠信)장군, 구인후(具仁候)공, 그리고 우리 철원의 김응하(金應河)장군등 모두 열두분 이신데요. 이분들중에 매우 특별한이를 한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충무공 정충신(1576년,선조9년-1636년,인조14년)장군! 본관은 광주. 호는 만운(晩雲). 1685년 숙종11년 충무공시호를 받으심. 다른분들은 모두 명문거족의 뼈대있는 집안 출신들 이지만, 유독 이분만은 개천에서 용나듯이 미천한 신분을 극복하고 입신출세를 하였는데요. 그의 부친은 광주목사의 통인(通引,수령의 심부름꾼)으로, 초년에 부인을 잃고 50이 넘도록 홀아비신세로 지내다가, 우연히 못생긴 관비를 만나 그를 낳았지요. 정충신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이란 칭찬을 들었는데, 마침 권율(權慄)이 광주목사로 부임하자, 아홉 살 때부터 그의 가복(家僕)으로 들어가 계도를 받으며 성장하지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는 17세의 어린나이로, 자진해서 권목사의 장계를 갖고 수천리 적진속을 달려 의주행재소의 선조에게 보고를 드리지요. 이에 임금님은 그의 충성과 용기를 크게 칭찬하여 면천(免賤)시켜 주시구요. 당시 병조판서였던 백사이항복은, 정충신의 비범함을 눈여겨보고 곁에 머물게 하면서, 학문과 무예를 닦도록 지도해 줍니다. 그래서 그해 가을 행재소의 무과시험에 급제 하고, 권율의 막내사위가 되지요. 그를 가르쳤던 백사가 권율의 큰 사위니까 결국 백사와는 동서지간이 되는데, 나중에 백사가 북청으로 유배 당한후 돌아갈때까지 시종하면서 부친같이 모셨다고 하네요. 정충신은 무관으로서 청렴과 충직한 자세로 직분을 다하였고, 국경수비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등, 많은 공로를 쌓아 부원수,포도대장,평안도병마절도사에 오르지요. 1626년 정묘호란이 있기 몇년전의 일화 한토막. 누루하치(후일의 청태조)의 세력이 명을 공략하면서 조선을 압박해 오자 조선에서는 협상사신을 보내는데, 이때 평안병사로 있던 그가 자진해 나서지요. 비록 체수는 작았지만, 까다로운 만주족과의 협상을 자임 할만큼 지혜와 담력도 뛰어 났거든요. 누루하치는 조선사신의 기를 초작에 꺾을 심산으로, 군막입구에 기치창검을 살벌하게 도열시키고, 큰 가마솥에 기름을 펄펄 끓게한 후에 정충신을 맞지요. 되놈왈, ‘너의 나라에는 사람이 그렇게도 없어서 너 같은 소소인을 보내느냐?’. 정충신 답왈, ‘우리나라에는 사람을 쓰는데 수준이 따로 있오. 인의와 도덕을 숭상하는 나라에는 대대인을 보내지만, 힘만믿고 포악한 나라에는 나같은 소소인을 보냅니다. 그런데 나같은 소소인이 무엇이 무서워 창검의 숲을 세웠나요?’. 되놈이 감탄하여 왈,‘가아(可兒))! 가아!(잘난사람,훌륭한 인물)’. 그의 명언 한마디 ‘한 개인은 명분 때문에 죽을수 있지만, 한 국가가 명분 때문에 죽을수는 없다’. 현실론의 주화파와 명분론의 주전파가 치열하게 다투던 당시의 시대상황이 떠 오르는 군요. 주어진 여건과 시대환경을 탓하지않고, 국궁진력(鞠躬盡力)의 자세로 최선을 다한 인간승리의 모습에 가슴이 찡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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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img!!김 영칠 수필가 우리 조상님들은 공부를 어떻게 하셨을까요?. 책도 부족하고 불도 신통치 않고 신분차별 많던 시대. 교육시설미비와 물자부족, 인적교류가 어렵던 시절에 공부를 어떻게 하셨는지? 그리고 선비들의 공부하는 기본자세나 방법은 어떠 했는지?. 조선조의 교육제도를 보면 국공립 교육기관으로는, 서울의 성균관과 4부학당, 지방은 각 고을마다 1개소씩 214개소의 향교가 운영 되었구요. 사립으로는 서원이 약400여개소, 서당은 웬만한 마을마다 1개소정도 있었대요. 서당이 초등교육이라면 향교와 사부학당, 서원은 중고등수준이고, 성균관은 국립대학격이라 할까요. 후기에 이르러 향교의 운영이 파행으로 흐른 반면, 관료출신과 학자들에 의한 서원의 운영은 상대적인 질적수준의 차별화로 우수인재들의 학문도장이 되기도 했구요. 선비의 일생은, 수교(受敎)와 수학(修學), 출사(出仕), 은퇴(隱退)의 4단계로 나눌수 있는데요. 6,7세까지는 집에서 부모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8,9세에 학당에 들어가 정식공부하는 수학기간을 거치면, 생원진사는 대략25세, 대과는 평균35세 전후에 보아 출사하게 되지요. 그래서 길게는 40-50년, 짧게는 10-20년을 벼슬살이 한후 대략 70중반쯤 물러나지요. 선비들의 교육과정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갈고닦는 ‘수기(修己)’와 세상에 나가 백성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의 두 단계로 나눌수 있는데요.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선생 같이 수기와 학문에만 뜻을 두어, 왕이 13번을 불러도 일체 응하질 않은 분이 있는가 하면,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선생처럼 마지못해 잠시 출사했다 학문으로 돌아간 분,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선생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선생 같이, 학문과 치인을 겸한 경세의 큰 어른들도 계셨지요. 선비들이 수기와 학문하는 모습을 보면, 처절 하리만큼 철저했고, 가혹할 정도로 엄격했음을 기록에서 확인 할수 있는데요. 모름지기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옛 선비들의 공부자세를 한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선비들은 책을 매우 신성시 했는데요. 그래서 책을 읽을 때면, 마치 무슨 의식을 거행하는 것처럼 정중 했대요. 책을 읽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고, 옷깃을 바로 잡은후에 독서를 시작 합니다. 독서하면 공자님의 ‘위편삼절(韋編三絶, 가죽으로 맨 역경이 여러번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음)’의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조선시대의 독서가로는,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선생과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선생,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선생을 손꼽지요. 미암은 주자대전을 배송(背誦, 책을 등뒤에 놓고 외움)하였고, 구봉은 주자어류를 모두 배송 하였으며, 중봉은 두가지를 모두 배송 하였대요. 주자대전은 90책, 주자어류는 104권 50책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인데, 주자학공부의 필독서 라는군요. 조선의 독서광으로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1604-1684)이란 분이 계셨는데요. 그는 어려서 아주 우둔하였지만, 부단한 글 공부를 통해 조선의 손꼽히는 인물이 되었지요. 1만번 이상 읽은글이 36편이나 되고, 그중 사기의 백이전(伯夷傳)은 무려 11만3천번을 넘게 읽었다는군요. 그래서 각고의 노력 끝에 59세에 문과급제를 하지요. 백곡이 독서기에서 밝힌 책을 보면, 경전과 역사서, 문장가의 글 중에서 어떤 것은 6만-7만번씩 읽었으며, 적게 읽은것도 수천번 이었다는군요. 여기에 비하면, 중용을 8백번 읽은 선조때의 임제(林悌,1549-1587)는 쨉도 않되지요. 아무튼 학문에 치중한 선비나, 과거시험을 통해 조정관료로 나아간 분들은, 사서와 삼경을 수백, 수천번 읽어서 외우고 당시(唐詩)는 최소한 300수 정도를 줄줄 외워 읇는 것이 기본 이었대요. 과거시험의 1차 대책은 시제가 나오면, 그에 합당한 논리를 즉석에서 작성했구요. 3차의 전시에서는 시무대책을 물으면, 경전과 사서, 시문구절을 줄줄 외워서 예를들고 종합적인 자기의견을 피력해야 하였다니, 학문의 깊이가 좀처럼 깊지 않고는 않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조선왕조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500년이상을 지탱할수 있었던 근본동력은, 이와같이 지독한 공부벌레들과 투철한 두뇌집단의 뒷받침 때문 아닐까요.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문치와 문화의 특질에 대한 또다른 표현 같기도 합니다.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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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얘기~@img!!김 영칠 수필가 얼마전에 여주를 다녀왔습니다. 여주하면 떠오르는 임금님 세종대왕! 그런데요. 세종은 우리가 잘아는 분이지만요. 바로 그 옆에 또다른 영릉이 있었어요. 같은 영릉이지만 세종의 능호는 영릉(英陵). 효종(孝宗,17대, 1619-1659)은 영릉(寧陵)이었지요. 효종의 묘역은 같은언덕에 위아래로 자좌오향(정남쪽 방향)의 쌍릉을 이룬 모습이 고즈넉한데, 늦가을의 풍치가 350여년의 전설과 함께 서리서리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1637년 정월그믐. 찬바람이 몰아치는 송파삼전도 벌판. 아홉계단위의 청태종이 갑자기 밖으로 나오더니 거시기를 꺼내들고 남향을 향해 오줌을 갈깁니다. 찬바람에 휘날린 오줌발이 단하의 인조 머리위에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이날 우리임금님은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로 항복의 인사를 치르지요. 세번 무릅을 꿇고 매세번씩 이마를 땅에 부딯치는데, 그 소리가 청태종의 귀에 들려야 하는 오랑캐 예법이래요. 청태종은 갈퀴수염을 쓰다듬으며 왈 ‘이후에는 다시금 딴맘 먹지말라. 너희백성 50만명과 너의 아들 둘을 내놓아라.’ 이리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심양으로 끌려가 8년간의 볼모생활을 겪지요. 세월은 흘러 태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한 어느날, 이제는 조선이 감히 딴맘 먹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에서, 두왕자와 조선신하들을 불러 송별연을 베풉니다. ‘조선의 두왕자!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으면 한가지씩 말해보라.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 이에 소현세자 왈 ‘소신이 지난 8년간 대국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저의 소원은 폐하께서 애용하시는 용연(용벼루)을 주시면 일생을 두고 망극한 성은을 간직 하오리다’. 되놈왈 ‘과연 안목이 높은지고. 언제 보았는가. 역시 세자의 자질은 다르구나. 그럼 봉림의 소원은 무엇인고?’. 봉림 왈 ‘분명히 소원을 다 들어 주신다고 약조하셨죠?. 저의 소원은 끌려온 조선백성들과 같이 돌아가는 것 입니다’. 갑자기 일그러지는 되놈의 안면근육. 그러나 한번 뱉은 말이니 명색이 천자로서 뒤집을수는 없는노릇. ‘무서운 소망이로고... 좋다. 네 소원대로 약조하마’. 그렇게 해서 8년만에 돌아온 고향. 임금과 두왕자가 마주앉아 회포를 나눕니다. ‘타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그래 청세종이 뭐라 하드냐?’. 봉림대군 왈 ‘오랑캐가 소원을 얘기 하라기에, 같이 고생한 백성을 모두 풀어달라 했지요. 한입으로 두말할수 없었던지 들어 주더군요’. 뒤이어 소현세자 왈 ‘저는 처음에 원한을 품었으나, 차츰 생활 하다보니 역시 대국은 달랐습니다. 세종의 인품도 은덕이 느껴 졌구요. 안목에서 뒤지지 않기위해 세종이 애용하는 용벼루를 달라고 했더니, 역시 세자의 국량은 다르다고 칭찬하면서 주더군요’. 잠시 죽음같은 침묵이 흐른 순간 인조의 대갈일성. ‘예잇 못난놈! 애비가 치욕의 한을 입었는데, 간특한 되놈의 꾀에 속아 은덕까지 느꼈다니...’ 인조는 부들부들 떨면서 용벼루를 들어 소현세자의 면상에 날리지요. 이마에 낭자하게 피를 쏟으며 실신한 소현세자.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없는데, 아무튼 세자는 그렇게 비명에 가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과 두아들도 사약으로 생을 마치구요. 이렇게 되자 둘째인 봉림대군이 갑자기 등극하여 효종이 되시지요. 효종은 재위 10년동안, 송시열(宋時烈,1607-1689)선생과 이완(李浣,1602-1674)대장등 인재를 발탁하여 북벌(北伐,청나라에 보복하자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이미 청나라는 천하의 대국으로 우리가 넘볼수 없는 존재가 되었구요. 효종도 젊은시절 너무많은 고생을 한 때문인지, 신병이 들어 41세를 일기로 가십니다. 효종의 죽음과 함께 북벌의 꿈도 사라지고.... 힘이 없는 국가나 백성의 비애가 얼마나 큰 것인지. 이런걸 보면 힘이 곧 정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드넓은 만주대륙을 다 잃어버리고, 왜소하게 줄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돌아 보면, 안타까움과 애닳음이 한없이 끓어 오릅니다. 효종의 영릉길이 마냥 무겁기만 했습니다. (김 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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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얘기~@img!!“갈밭마을 젊은여인 울음도 서러워라/관아 앞에 울부짖다 하늘보고 호소하네/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갓난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해도 범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아전이 호통하니 단벌소만 끌려갔네/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 붉은피 자리에 낭자 하니/스스로 한탄하네 ‘아이낳은 죄로구나’ (생략).” 낳은지 3일된 갓난아이를 장정으로 둔갑하여 군적에 올리고 세금을 독촉하니, 돈이 없어 못내니까 한 마리뿐인 소를 끌어가 버렸는데, 이를 본 남편이 억울하여 자기의 거시기를 잘랐어요. 아내는 분함을 못이겨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그것을 들고 관아에 가 하소연 해도, 호랑이 같은 문지기가 막았다는 내용 인데요. 세상에! 거시기를 스스로 자르다니? 얼마나 가혹한 세상 이었기에? 좀처럼 믿기지않으시죠?. 위의 글은 조선말엽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선생의 ‘애절양’이란 시의 일부 인데요. 다산이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하던 1803년 가을, 이웃의 끔찍한 정황을 보고 지었다는군요. 앞의 경우는 스스로 자른거니까 형벌은 아닌데요. 역사에서는 궁형(宮刑)이라고 해서, 거시기를 자르는걸 가장 가혹하고 치욕적인 형벌로 여겼는데, 궁형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마 ‘사기(史記)’를 쓴 중국 한나라때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일거예요. 그는 자기친구의 억울함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을 받았는데, 그런 모욕과 좌절감을 극복하고 만세역사에 귀감이 되는 ‘사기’를 남겼지요. 잠실궁형(蠶室宮刑)이란게 있는데, 죄지은 자의 거시기를 자르는 방이 누에치는 방처럼 밀폐되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 이구요. 참 내시들은 의무적으로 거세를 했는데, 개중엔 가짜도 있어 말썽을 피웠다죠. 그런데 갖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죄아닌 죄 때문에, 불쌍한 백성이 거시기를 자르는 이 기막힌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일까요? 조선왕조의 마지막 전성기인 영정조의 문예부흥기는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막을 내리지요. 그리고 열한살,여덟살의 어린임금들이 연이어 즉위하고, 나무꾼출신의 강화도령까지 임금되는 세상이 있었지요. 임금이 아무것도 모르니 정치는 자연히 궁중여인이나 사대부들이 독점하게 되구요. 벼슬은 세도가들의 전유물로 전락하여 매관매직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중앙조정이 썩으니 지방은 그 더러움이 더욱 악취를 풍기게 되구요. 조선왕조의 세금체계는 ‘삼정(三政)’ 이라해서,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세부문으로 나뉘었는데요. ‘전정’은 토지에서 나오는 조세를 걷는 일이고, ‘군정’은 장정이 군역을 부담하는일. ‘환곡’은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기에 갚는일 이지요. 문제는 지방수령들이 삼정의 운영을 돈벌이와 출세의 수단으로 악용한데서 비롯되지요. 자연재해가 잇다르고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여 인구가 줄고 백성들이 도탄에서 신음하지요. 그런데도 백성의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백성을 착취하기에 급급한 지방수령과 이를 방관한 조정. 그래서 다산은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 썩은 나라, 승냥이가 판치는 나라’라고 탄식 했습니다 앞서 ‘거시기 사례’는 젖먹이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인데요, 이외에도 죽은사람에게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노인의 나이를 젊게 고쳐서 메기는 강년채(降年債), 친족에게 메기는 족징, 장부를 조작하는 허류와 반작, 쌀겨를 섞어서 대여하는 반백 등등..갖은 악랄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괴롭혔지요. 그러니 홍경래난, 동학혁명같은 민란이 일어날 수 밖에요. 조선조말엽의 부패와 가렴주구, 총체적인 무질서는 나라멸망의 전주곡이 아니었는지. 그러고 보면, 옛날이 마냥 좋은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의 고마움을 알자구요. (김 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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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고지도에 비친 옛 철원~@img!!조선시대 철원지도 (古地圖에 나타난 철원) 서울대 규장각이 보관하고 있는 '광여도(廣輿圖)' 는 1800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지도이다. 회화식 지도로 제작된 이 지도는 모두 7책으로 구성돼 있고 그 중 강원도 ‘철원부(鐵原府)’편에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호구, 병사, 전, 답, 창(倉), 면, 경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지도와 달리 풍수지리사상에 근거한 경관 인식이 잘 나타나 있어 지도에 묘사된 산줄기를 중심으로 독해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고지도를 쫒아 옛 철원부와 김화현의 역사도 공부하며 고향의 정서를 느껴보자. ~@img!!제1편 鐵原府 지도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 땅의 고암 산에서부터 삼부연 폭포와 용화산 그리고 좌측에는 지금의 경기도 행정구역인 永平界가 들어있어 방대했던 鐵原府의 행정구역과 생활상을 알 수 있다. 갈말면(乫末面) 객사(客舍) 거북로(去北路) 거안협로(去安峽路) 경로(京路) 고남산(古南山) 고석정(孤石亭) 고암산(高巖山) 고을파면(高乙坡面) 관인면(官仁面) 궁왕고도(弓王故都) 금학산(金鶴山) 대현(大峴) 도덕진(道德津) 동변면(東邊面) 마산(馬山) 면산(面山) 무장면(畝長面) 보개산(寶盖山) 봉(烽) 북관정(北寬亭) 북면(北面) 삼봉(三峯) 삼부연(三釜淵) 상현(霜峴) 서변면(西邊面) 선창(船倉) 소리산(所里山) 소현(小峴) 송내면(松內面) 송현(松峴) 심원사(深源寺) 아(衙) 어운동면(於雲洞面) 용화산(龍化山) 요동백사우(遠東伯祠宇) 일봉산(日峯山) 적석사(積石寺) 창(倉) 평원(平原) 풍전역(豊田驛) 할미산(割眉山) 향교(鄕校) 험흘진(險屹津) ~@img!! 철원부는 철원군 철원읍, 동송읍, 갈말읍, 어운면, 북면, 묘장면과 포천군 관인면, 연천군 신서면에 해당한다. 읍치는 철원읍 관전리에 있었다. 고을은 내륙의 광활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지도에도 平原이란 글자를 넣어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주기를 보면 밭이 논의 열 배를 넘고 있어 아직도 논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후삼국시기 태봉의 궁예가 都城를 만들었던 곳을 弓王故都로 표시하였다. 이 도성에는 外城과 內城이 있었는데 모두 土城이었다고 하며 지금은 휴전선 안쪽 비무장지대에 있다. 읍치에는 아주 중요한 건물만 표시되어 있지만 다른 공간에 비해 과장·확대되어 있고 풍수적 관념이 들어가 있다. 그 아래에 있는 遼東伯祠宇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여진족 建州衛의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한 金應河(1580-1618)를 배향하여 1666년(현종 7)에 賜額받은 褒忠祠이다. 고을은 두 개의 큰 물줄기로 갈라진다. 지도 오른쪽이 임진강의 큰 지류인 한탄강이고 왼쪽이 마곡천이다. 철원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용암대지로 나오는데 오른쪽 한탄강은 바로 그 용암이 지나간 자리에 만들어진 하천이다. 따라서 끝없이 펼쳐진 평원 아래로 강가의 절벽이 이어지는 보기 드문 풍경을 만들고 있다. 孤石亭은 이러한 한탄강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옆에 지어진 정자이다. 그 풍경이 아름다워 일찍이 신라의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이 놀았다는 기록이 전해오며 조선 중기의 義賊 임꺽정이 숨어살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 민 호 : 3019호 ○ 속 오 군 : 785명 ○ 감 영 군 : 217명 ○ 관할구역 : 동변면 외 9면 ○ 기 타 : 성곽 없음. 창고 2개소. 나루터 2개소.봉화대 2개소.사찰 2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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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접경지역 주민대피시설에 대하여~@img!!지난해 11월 23일 연평도 포격도발을 계기로 그동안 관심의 변두리에 있었던 접경지역 주민 대피시설과 방공호가 다시 뜨겁게 부상하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와 연천군, 강원도 철원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고성군 등 최 접경지역의 대피시설 및 방공호는 수 백 여개로 이미 30여 년 전에 설치되어서 낙후되고 노후화된 곳이 많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재래시장 공터나 공공건물 공터 등에 건설한 대부분의 주민대피시설은 그동안 무관심과 관리부실로 균열이 심하고 비가 새어 흉물로 변하였다. 심지어 어떤 시설은 시건장치의 고장으로 학생들의 탈선장소로도 이용되는 등 우범지대 화 되고 있다. 해당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쓸모도 없이 관리만 힘들다는 이유로 무작정 매립하거나 아예 폐쇄조치하고 있다. 근래에는 아파트나 상가의 지하실이나 지하주차장을 대피시설로 지정하여 집중포격 시에 매몰의 위험이 잔재해 있다. 민방위 관계자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주민들을 탈출시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고 항변하지만, 긴급한 상황에서 단기 또는 장기적으로 피신할 수 있는 1,2 등급의 대피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즉 대피시설에는 방송청취 장비와 비상식량, 비상약품, 샤워부스, 식수대, 이불, 화장실 등을 갖추어야 한다. 강원도 광역자치단체에서는 원칙적으로 새로이 건설되는 마을회관, 공공기관 등에 지하 대피시설의 신축을 지원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나 대다수의 시군 자치단체에서는 예산 등의 과다지출로 난색을 표하고 있다. 1개당 억대이상의 비용이 드는 점을 볼 때, 국가지원이 많게는 70%, 적게는 50%를 지원하겠다고 하나 열악한 접경지역의 지방자치단체로서는 여간 부담이 되는 금액이 아닐 수 없다. 바라건대, 정부에서는 국민의 안보의식강화와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정책기조를 보여주어야 하며, 주민대피시설과 방공호 시설비용을 지방자치단체에 부담시키지 말고 전액 국비로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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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낙엽따라 가버린 사람~@img!!존경하는 C선배님!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이렇게 급작스레 영별을 할수 있단 말인가요. 엊그제 뵐때도 밝은 웃음을 주신분이, 오늘 아침 충격스런 부음을 전해 주시다니. 그동안 지병으로 고생 하시면서도, 특유의 강인함으로 병마를 이기셔서 우리모두 축복을 해 드렸었는데. 지난번 ‘환경보호지킴이 자연정화활동’에도 나오셔서 농담을 나눴었고, 선후배들과의 모임에도 꼭 얼굴을 보여주셔서 든든 했는데. ‘밤새 안녕’이라더니 이를두고 하는 말 인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살아 있다는게 무엇인지? 이승과 저승의 차이가 무엇인지?. 도무지 분별하기 어려운게 우리네 인생사 같기도 합니다. 찬란하게 드리웠던 만산의 홍엽이 소슬한 늦가을 바람에 나락으로 지듯이, 선배님은 2011년 동짓달 초하룻날, 쓸쓸한 낙엽처럼 그렇게 가셨군요. 행운유수와 같은 인생무상과 허무를 곱씹으면서 삼가 선배님의 명복을 빕니다. 천붕지통의 충격과 슬픔에 빠지신 유족들께도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존경하는 C선배님! 조문자리에서 선배님 영정을 뵈오니, 새삼 옛날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 했지요. 선배님과의 인연, 참으로 고맙고 아름답고 보람있는 시절이었습니다. 되돌아 보면 한세대의 세월 저편에 묻혀버린 1970년대 중반, 우리는 새마을사업의 한솥밥을 먹는 선후배 공직자로 만났었지요. 선배님은 공직이나 인생연륜 모두 저보다 훨씬 높으셔서, 항상 제가 따르며 배웠었지요. 저를 친동생처럼 아껴 주셨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지요. 특히 일이 많아 사흘돌이로 밤샘작업을 할때면, 지루함과 피로를 풀기위해 카세트 테이프로 음악을 즐겨 듣곤했지요. 아무리 다급하고 괴로워도 콧노래 흥얼거림으로 낙관을 잃지 않으셨던 선배님. 선배님은 공군군악대 출신으로 음악에 남다를 조예가 계셨지요. 어디서 구해오셨는지 몇일을 듣고도 남을 음악테이프를 번갈아 바꾸면서 참 많이도 들었습니다. 트롯트, 가곡, 크래식, 흑인영가, 미국민요, 교향곡등등. 그런 감미롭고 장쾌한 음악덕분에, 산더미 같은 개발업무를 재미있게 수행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선배님은 특히 트롬펫을 잘 부셨는데, 여가에 들려주시던 명곡연주가 일품 이셨지요. 토요일 오후 적막이 내려앉은 사무실의 작업장에서, 마치 궁중연주에 초대된 왕공귀인마냥 턱을 괴고앉아 감상하던 선배님의 연주가 어제일 처럼 명멸하네요. ‘파란하늘과 하얀구름, 축복받은 밝은 낮과 신성한 어두운 밤...’으로 이어지는 루이암스트롱의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아! 감명 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지요. 쥬페의 ‘경기병 서곡’.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르린필의 경기병 서곡은 행진곡풍의 씩씩함과 보무당당한 군대의 장중함이 어우러진 또다른 감동 이었지요. 용사들의 전진과 후퇴, 승리와 죽음, 생사와 비애가 응축된 연주는, 인생사의 희로애락을 담은 완벽한 드라마 같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 듣는이의 심금을 울렸지요. 저는 음악에 문외한이라 처음에는 생소하였지만, 들을수록 감흥이 생겨서, 그후 경기병서곡은 아마 수백번도 더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시대, 힘든 공직자의 길에서 희망과 자신을 갖고 매진할수 있도록 힘을 준 것은, 30년전에 선배님이 들려 주셨던 ‘경기병 서곡’ 이었음을 잊지않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C선배님! 나목의 끝머리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처럼, 허전함 속에 밀려오는 아쉬움이 한방울의 존경과 감사로 선배님의 영결종천을 축원합니다. ‘천지는 만물이 묵어가는 여관이요, 인생은 천지사이를 섬광처럼 스쳐가는 나그네’라는 옛말씀이 더욱 새롭게 다가 옵니다. ‘경기병 서곡’을 선배님 영전에 바칩니다. 삼가 영면 하소서. (김 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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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img!!김영칠 수필가 조선왕조의 실질적인 태평성대는 9대성종때라 합니다. 성종은 조선중기의 발전기반을 다진 분으로 13세에 등극하여 20세부터 친정을 시작했지요. 권신들을 견제하고 세조대에 굴절된 유교정치를 바로잡기위해 기개있는 선비들을 중용하구요. 현실주의자인 기성관료(훈구파)들과, 유교적 근본주의자인 선비(사림파)의 두 정치세력을 조화시키면서, 개국초부터 추진하던 문물개혁사업을 마무리 짔지요. 조선왕조의 헌법인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등의 국책사업을 완성하구요. 이런사업들이 완성의 의미를 갖는 것은, 국왕,훈신,사림등 당시의 대표적 정치세력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공동참여하여 훌륭한 성과를 만들어 냈다는데 있지요. 그리하여 개국한지 100년만에 조선적 특색을 지닌 통치질서와 문화를 완성했기에, 성종(成宗)의 묘호는 매우 적절하다는 것이 역사의 평가입니다. 성종은 비록 38세의 젊은나이에 돌아갔으나, 재위25년동안 덕망과 포용으로 신하와 백성들에게 따뜻한 은혜를 베풀었지요. 부인 열두명에 스물여덟의 자녀를 둘만치 욕심 과한 면이 있는가 하면, 일만치 놀기도 좋아했고 특히 신하들과의 흉허물없는 어울림을 무척 즐겼대요. 술도 보통을 넘었구요. 성종이 아끼는 신하중에 ‘손순효(孫舜孝1427-1497) ’라는 분이 계셨지요. 아호가 물재(勿齋)인 손순효는 강원감사를 역임하신적도 있는데, 원래 성리학과 화묵(畵墨)에 능하였고, 문장 또한 뛰어나서 임금이 수시로 불러 일을 시키곤 했대요. 어느날 중국에 보낼 국서작성으로 물재를 찾았는데, 여러시간이 지난후에 나타난 물재는 남이 부축 해야만 걸을수 있을 정도로 대취해 있더래요. 성종왈, ‘내가 경에게 그토록 경계하였거늘 어찌하여 그리 대취하였는가? 그래가지고 어떻게 국서를 짓겠는가?’. 물재 답하여 왈, ‘오늘은 신의 딸이 시집 가는날 이오라, 어쩔수 없어 과음 하였습니다. 하오나 문장짓는 일은 술과는 상관 없아오니 하명 하소서’. 옷매무새를 고친 물재가 붓을잡아 단숨에 일필휘지 합니다. 임금이 보시니 천하 명문인지라 크게 칭찬하시면서 가라사대, ‘앞으로는 이 잔으로 반드시 한잔이상 마시지 말라’하고 은잔하나를 하사 하셨대요. 그런후 어느날도 임금이 갑자기 하문할 일이 있어 물재를 찾았는데, 이번에도 거나하게 취하여 들어온 물재. ‘내 경에게 잔까지 주면서 술을 조금씩 자시라 했는데 어찌된 일인가?’. ‘분부대로 매일 한잔씩 밖에는 먹지 않았아 옵니다’. ‘그러면 내가 준 술잔을 내놔 보소’. 그런데 물재가 품에서 내놓은 것은 어마어마하게 큰잔. ‘아니? 이건 내가 준 잔이 아니지 않는가?’. ‘실은 전하께서 주신잔이 너무적어 좀 늘렸을뿐 이옵니다’. 성종은 박장대소를 하면서 물재의 술버릇을 너그러히 용서 하셨다구요. 성종은 춘추가 30을 넘어서야 그의 아들 연산군으로 세자를 삼았지요. 그런지 며칠후 대궐에서 큰 잔치를 열었는데, 이때 술이 거나하게 취한 물재가 왕에게 긴히 드릴말씀이 있다고 청하지요. 임금이 허락하자 물재는 서슴치 않고 걸어나가 용상을 어루만지며 왈, ‘이 용상이 가히 아깝습니다’. 임금이 답왈 ‘그러니 이제와서 어쩔수 없는일 아니오!’. 물재는 세자 연산군의 자질부족을 걱정했고, 임금은 속수무책을 한탄한 것 이지요. 두사람의 귀엣말 같은 대화를 알지못한 신하들은, 물재가 감히 용상을 범했다고 탄핵상소를 합니다. 성종은 ‘내가 경들의 말을 잘 듣지않고 여색을 가까이 한다고 충간하는 것 인데, 나의 허물을 들어내지 않으려고 그리 한 것이 무슨 죄 이겠오’. 두 사람의 걱정대로 세자는 후일 ‘폭군연산군’으로 오명을 남깁니다. 그 신하에 그 임금이라 할까요. 그뒤 성종이 돌아가자 물재는 벼슬을 버리고 산림속에 묻혀, 매일 술을 마시면서 성종의 깊은 은혜를 그리다 가셨다는군요. 명군과 명신만이 나눌수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이네요. (김 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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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잊혀진 「봉래호」~@img!!백과사전을 뒤져도 없고 그 흔한 사이버 검색창에 넣어도 어떠한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남북분단 후 베일에 가려진「蓬萊湖」다. 하지만 분단의 아픔을 겪은 철원 農業人 世代 대부분은 이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거기엔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다. 꿩이 날다 떨어질 만큼 규모가 사방 30여리에 이르는 대형저수지로 동란 이전까지만 해도 철원평야의 경지면적을 적셔 주었다는 저수지 이름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蓬萊號를 다녀왔거나 저수지의 기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설치년도가 너무 오래 되었고 남북으로 갈라진 이후 로는 갈 수가 없는 북녘 땅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애틋한 사연을 가진 봉래호 이지만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한때 철원농업의 젖줄 이었다. 라는 사실 때문이다. 중부지방 최대의 곡창지대를 적셔 준 젖줄, 6.25 비극이 가져온 잃어버린 유산 등 제법 문학적인 제목을 붙여도 괜찮을 듯싶은 蓬萊湖다. 하지만 철원 향토서적을 다 뒤적여도 이에 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번에 찾은 기록물의 대강을 요약한다면 봉래호는 일정시인 1920년대 남북한 통틀어 최대의 토목공사를 벌여 축조된 농업시설물로서 중부 내륙 최대의 곡창지역인 철원평야를 적셔준 대형저수지였다. 하지만 53년도 7월 정전협정 이후 북한 당국에 의해 물줄기가 끊겨버렸고 남쪽에서 용수혜택을 받았던 때를 거슬러 보면 이미 환갑의 나이가 들어 철원농업인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멀어졌다. 다만 인터넷 사이트인 구글을 검색하거나 금학산(947m)정상에 올라 본 사람이라면 남한 땅의 끝이요 북한 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고암산(일명 김일성 고지)옆으로 수평선을 이룬 물주머니를 볼 수 있다. 바로 봉래호저수지다. 문서를 살펴보면 구전으로 전해오는 바와 같이 전국 5대평야에 들었던 철원의 재송평야에 용수공급을 위해 일제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고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저수지를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저수량 4천5백만 톤, 관개면적은 12,000정보에 이르러 철원군과 경기도 포천일부도 적셔 주었다. 쉽게 얘기하자면 한국농어촌공사 철원지사가 관리하고 있는 토교저수지 보다 3배 정도의 저수량을 갖춘 대형저수지로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6.25동란으로 북한 땅에 편입되었고 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엔 물줄기마저 끊어놓는 바람에 전국 5대 평야에 꼽혔던 이 곳 재송평야 일대는 천수답 지역으로 변해버려 불모지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철원을 빼앗긴 김일성이가 통탄하며 물줄기를 끊고 황해도 연백평야로 돌렸다고 전해진다. 동란으로 인한 비극은 포화의 상처뿐만 아니라 삶의 고통을 수반했다. 비무장(DMZ)지대라는 낯선 단어는 살고 있던 주민들을 10 리 밖으로 몰아냈고 물주머니를 잃어버린 이곳 농업인들은 영농 출입증이라는 패쪽을 달고 지뢰밭을 피해가며 천수답을 경작하는 고달픈 영농을 계속해야만 했다. 세종 임금 때부터 평야로 불러온 중부내륙의 재송평야에 변화가 찾아 온 것은 1960년대 중반이다. 버림받은 폐허의 땅에 물줄기가 솟구쳤다. 철원 농업이 일대 부흥기를 맞이한 것은 5.16 군사 쿠테타 이후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고 잘살아 보세! 라는 외침 속에 농업용수원 개발 사업을 서둘렀다. 이러한 외침은 상흔으로 얼룩졌고 폐허의 땅으로 여겼던 철원 땅에서 대형 전천후 사업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 우리고장의 인물을 꼽자면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 원내 총무였던 김재순 의원 이였다. 당시 정권의 핵심그룹에 있던 그 분은 굳게 닫힌 민통선의 문을 열어 제치고 1966년「철원농업용수원 개발 사업」을 완료하여 고장의 젖줄인 토교저수지를 만든 1등 공신이 아닌가 한다. 북한이 고향인 김 의원은 남다른 향토애와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저수지설치사업 착공 6년 만인 74년도에 통수식을 치렀고 착공 12년 후인 1978년에 평야부 공사를 완료함에 따라 철원농업은 부흥기를 맞이했다. 초등학교 시절 전천후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 때는 공사기간이 너무 길어 천천히 하는 공사로 오인하기도 했지만 도내 최대의 곡창으로 불리는 철원 농업의 부흥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물줄기가 끊어짐에 따라 숫한 고생을 짊어진 이들은 역시 철원농업인들 이었다. 봉래호를 수원 공으로 농사짓던 지역에는 토교저수지와 동송 저수지(일명 강산저수지)가 축조됐고 한탄강변에는 대형양수장이 들어서 물 부족을 해결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철원의 드넓은 터전을 동주평, 재송평, 대야잔평 등으로 표기했다. 왕의 행차 또한 조선의 27대 임금 중 철원을 가장 많이 다녀간 분은 세종 임금이다. 조선600년 역사기록에도 한 차례도 철원을 찾지 않았던 임금이 대부분이지만 유독 세종은 태상왕과 상황 그리고 아들 문종과 함께 수 십 차례 이곳을 찾은 기록이 나타난다. 6진 개척과 더불어 강무장이 있었다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나라 살림과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드넓은 평야(농토)가 세종의 마음을 이곳에 머물게 했는지 모른다. 한탄강/남침용 땅굴/노동당사/ 녹슨 철길/애꾸눈 궁예 왕/ 이러한 단어가 암시하듯 따스함이 없는 냉전의 땅으로 불리는 이곳 「중부전선」 철원! 한 반도 지도를 놓고 보면 대한민국의 최북단으로 남쪽의 끝인데 DMZ으로 이어진 지평선 너머엔 철원평야의 일부가 남아있다. 베일에 가렸던 봉래호의 실체가 확인된 만큼 저수지 축조 당시의 제원에 맞는 물 관리가 이루어진다면 철책너머로 펼쳐진 철원평야의 잔 여지와 함께 황량한 평강고원에 이르기 까지 알곡이 영그는 공간으로 바뀔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농어촌공사 영북지사 박종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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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img!!김영칠 수필가 민주주의의 특징은 선거와 관광 같아요. 때만 되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선거, 그리고 따질 것 없이 무조건 떠나는 묻지마 관광. 지난번 추석휴가때는 중국관광객이 몇 만명씩이나 우리나라를 찾았었다는 소식도 있구요. 그동안 흥청망청 하다가 지금 파산직전에 놓인 그리스는 인구가 5천만인데 외래관광객이 8천만 이래요. 그런데 이 ‘선거와 관광’이란 말이, 전혀 엉뚱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아 좀 뭐한데요. 원래 선거와 관광은 조선왕조시대에 인재를 뽑는 제도 였다는군요. 인재선발의 방법에는, 시험으로 뽑는 ‘고시제도’와 유능한 인물을 추천에 의하여 가리는 ‘천거제도’가 있었는데, 이 둘을 합쳐 ‘선거(選擧)라고 불렀대요. 특히 과거시험은 선비들이 출세하는 최고의 등용문으로서, 과거보러 가는 것을 ’관광((觀光)‘이라 했구요.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본인의 신분은 물론, 가문의 위상이 180도 달라지니까 말그대로 빛을 보는거죠. 조선시대 인재등용의 대원칙은, “어진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 지방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과, “오직 재주있는 사람을 등용한다”는데 두었대요. 교육진흥을 위해서 국가가 지원하는 관학기관으로는, 서울의 성균관과 4부학당이 있고, 지방은 각 고을마다 향교가 있었구요. 성균관이나 향교는 성현의 제사와 교육을 병행하는 국공립형식의 고등교육기관 이었죠.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은, 국가의 장려정책에 힘입어 고종초에는 무려 909개소에 이르는데, 말년에는 그 폐해가 적지 않았대요. 그래서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려, 전국에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거를 하게 되구요. 고시에는 생원진사과와 문과, 무과, 잡과가 있는데 문과를 예로 들면, 소과(小科)인 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할 경우 하급관원이 되거나, 성균관에 진학하거나, 대과(大科)에 응시를 하지요. 대과는 3년마다 선발하는 정기시험인 ‘식년시’와 수시로 보는 ‘별시’, 임금이 성균관 문묘를 배알하고 치르는 ‘알성시’ 그리고,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하는 ‘경과(慶科)가 있었구요. 정기시험은 초시,복시,전시등 세차례 였는데, 보통 1만명이상의 지원자들이 경쟁을 벌여 초시에서 240명을 뽑고, 복시에서 33명을 추린후 최종적으로 궁궐에서 치르는 전시에서는, 복시합격자중에서 갑과3인, 을과7인, 병과23인의 등급만 정했대요. 최종경쟁율이 무려 300대 1을 넘네요. 조선조의 문과합격자가 총 14,620명이라니까, 수백만명이 과거에 매달린 셈이지요. 갑과로 장원급제한 사람은 특별대우와 함께 단번에 6품의 품계를 받는가 하면, 최하위 합격자인 병과23등은 8,9품의 품계를 받아 출발부터 차이가 났구요. 이율곡선생은 아홉 번 시험을 모두 장원급제하여 ‘9도장원공’의 별칭이 붙었대요. 그런데 시험성적이 좋다고 해서 반드시 출세하거나 훌륭한 인물이 되는건 아닌 것 같아요. 또 과거에 낙방했다 해서 실력 없는것도 아닌 것 같구요. 일찍이 충녕대군(세종)의 스승이셨던 문정공 이수선생은 과거에 떨어졌지만, 학문이 높아서 태종이 아들의 스승으로 모셨지요. 이충무공은 병과 4등으로 무과급제를 했고, 임진왜란때 도체찰사로 비상시국을 지휘했던 서애 유성룡선생이나, 영의정을 무려 다섯 번씩이나 역임하면서 사직을 지킨 오리 이원익선생, 육조의 참의,참판,판서를 모두 지내고 영의정을 다섯차례 역임한 양파 정태화선생은 모두 병과출신 이었지요. 그런가하면, 장원급제자 중에도 처세에 문제가 있어 중도탈락하거나, 출세와 이욕에 눈이 멀어 난신적자가 된 인물들이 부지기수로 많지요. ‘정유3흉(丁酉三兇)’으로 지탄받은 중종때의 김안로 같은 사람은 장원급제 출신이지만 대표적인 간신 이었구요. ‘천거’는 학문이 높지만 초야에 묻혀있는 인재를 발탁하기 위함인데, 지조있는 선비들은 임금이 몇 번을 불러도 응하질 않았지요. 그런데 이런얘기는 기강이 확립된 시대에나 통하는 원칙 일뿐이고, 망조가 드는 조선말엽에 이르면 온갖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의 추잡한 꼴이 난무하지요. 돈주고 산 수령자리를 미쳐 앉아 보기도 전에, 역시 돈주고 산 다른사람이 뒤따라 와서 내놓으란 일도 있었대요. 한심할 정도로 웃기는 세상 이었구만요... (김영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