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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

기사입력 2011.10.3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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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용상이 아깝습니다(此座可惜, 차좌가석) - ~@img!!김영칠 수필가 조선왕조의 실질적인 태평성대는 9대성종때라 합니다. 성종은 조선중기의 발전기반을 다진 분으로 13세에 등극하여 20세부터 친정을 시작했지요. 권신들을 견제하고 세조대에 굴절된 유교정치를 바로잡기위해 기개있는 선비들을 중용하구요. 현실주의자인 기성관료(훈구파)들과, 유교적 근본주의자인 선비(사림파)의 두 정치세력을 조화시키면서, 개국초부터 추진하던 문물개혁사업을 마무리 짔지요. 조선왕조의 헌법인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등의 국책사업을 완성하구요. 이런사업들이 완성의 의미를 갖는 것은, 국왕,훈신,사림등 당시의 대표적 정치세력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공동참여하여 훌륭한 성과를 만들어 냈다는데 있지요. 그리하여 개국한지 100년만에 조선적 특색을 지닌 통치질서와 문화를 완성했기에, 성종(成宗)의 묘호는 매우 적절하다는 것이 역사의 평가입니다. 성종은 비록 38세의 젊은나이에 돌아갔으나, 재위25년동안 덕망과 포용으로 신하와 백성들에게 따뜻한 은혜를 베풀었지요. 부인 열두명에 스물여덟의 자녀를 둘만치 욕심 과한 면이 있는가 하면, 일만치 놀기도 좋아했고 특히 신하들과의 흉허물없는 어울림을 무척 즐겼대요. 술도 보통을 넘었구요. 성종이 아끼는 신하중에 ‘손순효(孫舜孝1427-1497) ’라는 분이 계셨지요. 아호가 물재(勿齋)인 손순효는 강원감사를 역임하신적도 있는데, 원래 성리학과 화묵(畵墨)에 능하였고, 문장 또한 뛰어나서 임금이 수시로 불러 일을 시키곤 했대요. 어느날 중국에 보낼 국서작성으로 물재를 찾았는데, 여러시간이 지난후에 나타난 물재는 남이 부축 해야만 걸을수 있을 정도로 대취해 있더래요. 성종왈, ‘내가 경에게 그토록 경계하였거늘 어찌하여 그리 대취하였는가? 그래가지고 어떻게 국서를 짓겠는가?’. 물재 답하여 왈, ‘오늘은 신의 딸이 시집 가는날 이오라, 어쩔수 없어 과음 하였습니다. 하오나 문장짓는 일은 술과는 상관 없아오니 하명 하소서’. 옷매무새를 고친 물재가 붓을잡아 단숨에 일필휘지 합니다. 임금이 보시니 천하 명문인지라 크게 칭찬하시면서 가라사대, ‘앞으로는 이 잔으로 반드시 한잔이상 마시지 말라’하고 은잔하나를 하사 하셨대요. 그런후 어느날도 임금이 갑자기 하문할 일이 있어 물재를 찾았는데, 이번에도 거나하게 취하여 들어온 물재. ‘내 경에게 잔까지 주면서 술을 조금씩 자시라 했는데 어찌된 일인가?’. ‘분부대로 매일 한잔씩 밖에는 먹지 않았아 옵니다’. ‘그러면 내가 준 술잔을 내놔 보소’. 그런데 물재가 품에서 내놓은 것은 어마어마하게 큰잔. ‘아니? 이건 내가 준 잔이 아니지 않는가?’. ‘실은 전하께서 주신잔이 너무적어 좀 늘렸을뿐 이옵니다’. 성종은 박장대소를 하면서 물재의 술버릇을 너그러히 용서 하셨다구요. 성종은 춘추가 30을 넘어서야 그의 아들 연산군으로 세자를 삼았지요. 그런지 며칠후 대궐에서 큰 잔치를 열었는데, 이때 술이 거나하게 취한 물재가 왕에게 긴히 드릴말씀이 있다고 청하지요. 임금이 허락하자 물재는 서슴치 않고 걸어나가 용상을 어루만지며 왈, ‘이 용상이 가히 아깝습니다’. 임금이 답왈 ‘그러니 이제와서 어쩔수 없는일 아니오!’. 물재는 세자 연산군의 자질부족을 걱정했고, 임금은 속수무책을 한탄한 것 이지요. 두사람의 귀엣말 같은 대화를 알지못한 신하들은, 물재가 감히 용상을 범했다고 탄핵상소를 합니다. 성종은 ‘내가 경들의 말을 잘 듣지않고 여색을 가까이 한다고 충간하는 것 인데, 나의 허물을 들어내지 않으려고 그리 한 것이 무슨 죄 이겠오’. 두 사람의 걱정대로 세자는 후일 ‘폭군연산군’으로 오명을 남깁니다. 그 신하에 그 임금이라 할까요. 그뒤 성종이 돌아가자 물재는 벼슬을 버리고 산림속에 묻혀, 매일 술을 마시면서 성종의 깊은 은혜를 그리다 가셨다는군요. 명군과 명신만이 나눌수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이네요. (김 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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