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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얘기

기사입력 2011.11.3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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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종과 북벌 ~@img!!김 영칠 수필가 얼마전에 여주를 다녀왔습니다. 여주하면 떠오르는 임금님 세종대왕! 그런데요. 세종은 우리가 잘아는 분이지만요. 바로 그 옆에 또다른 영릉이 있었어요. 같은 영릉이지만 세종의 능호는 영릉(英陵). 효종(孝宗,17대, 1619-1659)은 영릉(寧陵)이었지요. 효종의 묘역은 같은언덕에 위아래로 자좌오향(정남쪽 방향)의 쌍릉을 이룬 모습이 고즈넉한데, 늦가을의 풍치가 350여년의 전설과 함께 서리서리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1637년 정월그믐. 찬바람이 몰아치는 송파삼전도 벌판. 아홉계단위의 청태종이 갑자기 밖으로 나오더니 거시기를 꺼내들고 남향을 향해 오줌을 갈깁니다. 찬바람에 휘날린 오줌발이 단하의 인조 머리위에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이날 우리임금님은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로 항복의 인사를 치르지요. 세번 무릅을 꿇고 매세번씩 이마를 땅에 부딯치는데, 그 소리가 청태종의 귀에 들려야 하는 오랑캐 예법이래요. 청태종은 갈퀴수염을 쓰다듬으며 왈 ‘이후에는 다시금 딴맘 먹지말라. 너희백성 50만명과 너의 아들 둘을 내놓아라.’ 이리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심양으로 끌려가 8년간의 볼모생활을 겪지요. 세월은 흘러 태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한 어느날, 이제는 조선이 감히 딴맘 먹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에서, 두왕자와 조선신하들을 불러 송별연을 베풉니다. ‘조선의 두왕자!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으면 한가지씩 말해보라.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 이에 소현세자 왈 ‘소신이 지난 8년간 대국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저의 소원은 폐하께서 애용하시는 용연(용벼루)을 주시면 일생을 두고 망극한 성은을 간직 하오리다’. 되놈왈 ‘과연 안목이 높은지고. 언제 보았는가. 역시 세자의 자질은 다르구나. 그럼 봉림의 소원은 무엇인고?’. 봉림 왈 ‘분명히 소원을 다 들어 주신다고 약조하셨죠?. 저의 소원은 끌려온 조선백성들과 같이 돌아가는 것 입니다’. 갑자기 일그러지는 되놈의 안면근육. 그러나 한번 뱉은 말이니 명색이 천자로서 뒤집을수는 없는노릇. ‘무서운 소망이로고... 좋다. 네 소원대로 약조하마’. 그렇게 해서 8년만에 돌아온 고향. 임금과 두왕자가 마주앉아 회포를 나눕니다. ‘타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그래 청세종이 뭐라 하드냐?’. 봉림대군 왈 ‘오랑캐가 소원을 얘기 하라기에, 같이 고생한 백성을 모두 풀어달라 했지요. 한입으로 두말할수 없었던지 들어 주더군요’. 뒤이어 소현세자 왈 ‘저는 처음에 원한을 품었으나, 차츰 생활 하다보니 역시 대국은 달랐습니다. 세종의 인품도 은덕이 느껴 졌구요. 안목에서 뒤지지 않기위해 세종이 애용하는 용벼루를 달라고 했더니, 역시 세자의 국량은 다르다고 칭찬하면서 주더군요’. 잠시 죽음같은 침묵이 흐른 순간 인조의 대갈일성. ‘예잇 못난놈! 애비가 치욕의 한을 입었는데, 간특한 되놈의 꾀에 속아 은덕까지 느꼈다니...’ 인조는 부들부들 떨면서 용벼루를 들어 소현세자의 면상에 날리지요. 이마에 낭자하게 피를 쏟으며 실신한 소현세자.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없는데, 아무튼 세자는 그렇게 비명에 가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과 두아들도 사약으로 생을 마치구요. 이렇게 되자 둘째인 봉림대군이 갑자기 등극하여 효종이 되시지요. 효종은 재위 10년동안, 송시열(宋時烈,1607-1689)선생과 이완(李浣,1602-1674)대장등 인재를 발탁하여 북벌(北伐,청나라에 보복하자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이미 청나라는 천하의 대국으로 우리가 넘볼수 없는 존재가 되었구요. 효종도 젊은시절 너무많은 고생을 한 때문인지, 신병이 들어 41세를 일기로 가십니다. 효종의 죽음과 함께 북벌의 꿈도 사라지고.... 힘이 없는 국가나 백성의 비애가 얼마나 큰 것인지. 이런걸 보면 힘이 곧 정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드넓은 만주대륙을 다 잃어버리고, 왜소하게 줄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돌아 보면, 안타까움과 애닳음이 한없이 끓어 오릅니다. 효종의 영릉길이 마냥 무겁기만 했습니다. (김 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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