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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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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

스승과 제자의 어긋난 만남, 변계량 선생

~@img!!김영칠 수필가 사대부국가 조선의 제왕학 교육은 대단히 철저 했는데요. 임금도 매일 한차례 이상씩 신하들의 경연(經筵)을 들어 야만 했고, 특히 왕세자 또는 왕세손은 ‘시강원(侍講院)’이라는 별도의 전담기구를 설치하여 가르쳤지요. 특히 장차 군왕이 될 왕세자를 가르치는 시강관은 역활과 책임이 막중해서, 학문과 인품이 훌륭한 신료나 선비를 골라 뽑았습니다. 오늘은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을 가르친 변계량(卞季良,1369-1430) 선생 말씀을 드려 보고자 합니다. 본관이 밀양인 선생은 자가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으로, 고려말에 태어나 조선개국초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 했지요. 이미 네 살에 고시(古詩)를 외웠고 여섯 살에 한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머리가 뛰어나 열일곱의 약관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구요. 하늘이 낸 문재(文才)라 할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나, 문묘의 비문과 무학대사의 묘비명, 조선의 창업을 노래한 ‘화산별곡’을 지었습니다. 대제학을 20여년간 역임한 대표적인 문형(文衡)으로 수많은 학사들을 길러냈고, 특히 외교문서에 능통하여 명과 왜와의 까다로운 문제를 명쾌하게 풀기도 했지요. 태종은 선생의 학문을 높이 사서 그에게 세자 양녕대군의 교육을 명 하는데요. 그런데 아시다 시피 ‘양녕’이 누구 입니까? 천하의 바람둥이, 장안제일의 한량, 그 누구도 다스릴 수 없는 삐딱한 문제아 였거든요. 사실 양녕은 아버지를 닮아 천성이 호방뇌락 하면서도 학문적인 자질이 출중 하였지요. 태종은 늦게얻은 아들인데다 적자승계의 전통을 확립하고자 하는 욕심에 열한살의 양녕을 왕세자로 봉하는데요. 그러나 아버지의 살육행위에 염증을 느낀데다, 천성적인 자유분망함과 호색증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옆으로 새고 말았습니다. 대군이 학문을 게을리 한다는 사간원의 상소가 빗발치자, 태종은 동궁에 근무하는 내시의 볼기를 치고, 시강관인 변계량을 질책하지요. 그러나 세자의 버릇은 여전해서 심야월장과 궁궐이탈은 보통이고, 서울기생 봉지련, 초궁장, 칠점생, 평양기생 ‘소앵’ 등 맘에드는 여인들과 어울려 기행과 추문을 밥먹듯 일으킵니다. 한참 뒤에는 궁중을 발칵 뒤집는 사건이 또 일어나는데요. 바로 ‘어리사건’. 대신 곽선의 첩 ‘어리’를 양녕이 보쌈을 해서 세자궁으로 뺐어온 겁니다. 이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양녕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던 조정대신들이 들고 일어나, 세자와 시강관의 탄핵을 요구 하는데요. 이에 난감해진 태종은 선생에게 밀교(密敎)를 내려, “세자가 종묘에 가서 반성하고 맹세하게 하라”고 합니다. 선생이 양녕에게 태종의 뜻을 알리자 양녕 왈, “내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종묘에 고할 반성문을 선생이 지으시오. 종묘에 고하고 나서는 전하께 글을 올리고자 하니 함께 지으시오”. 이렇게 해서 조선왕조 최초로 왕세자가 종묘에서 사죄하는 일이 벌어지는데요. “증손 왕세자 신 이제(李褆, 양녕대군의 이름)는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법도를 무너뜨리고 방종 때문에 예의를 무너 뜨렸으며, 여러번 어버이에게 순종 하지않아 그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였고, 위로는 조종의 덕을 더렵혔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이미 고한 뒤에 지금의 이 말에 변함이 있으면, 조종의 영령들께서는 반드시 벌을 내려 용서하지 마소서”. 양녕은 8가지 조목을 들어 자신의 죄를 고하고 태종에게도 반성문을 제출하는데, 모두 선생이 대신 지은 것 이었습니다. 그러고도 양녕의 버릇은 달라지지 않아서 결국 25세에 ‘폐세자’를 당하는데, 이를 옆에서 말없이 지켜봐야 하는 선생의 마음은 어떠 했을까요?. 스승과 제자의 잘못된 만남, 뒤틀리고 어긋난 운명앞에 한 없는 회한의 눈물을 쏟았는지도 모르겠군요. 태종이 돌아가고 세종이 즉위하자, 선생은 경연관으로 위촉되어 세종에게 학문을 강론했고, 말년에는 다시 왕세자(나중의 문종)의 시강관이 되지요. 양녕대군과 세종, 문종을 연이어 가르쳤으니 가히 당대의 큰 스승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학자로서의 외형적인 영광뒤에는 집안 누이와 조카딸의 음행으로 구설수를 탓고, 주변으로부터 여성학대와 편벽고집의 성품이라고 비판을 받는가 하면, 이혼과 재혼을 여러차례 하는등 불행한 일면도 없지 않았지요. 그럼에도 그가 현달(顯達)의 영예를 누릴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소한 결점을 감싸주고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적극적으로 아껴준, 태종과 세종의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선생이 자손들에게 남긴 ‘가훈’ 한편을 소개 합니다. “인생은 금과 돌이 아니어든/ 소년시절 몇때나 될까?/ 젊어서 노력 아니하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다/ 부지런함과 검소함은 옛사람의 가르침대로 하고/ 형설의 공으로 배우고 높은 학문을 연구하라”.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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