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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어느 무인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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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어느 무인의 전설

김 영 칠 (강원도문화원연합회 사무처장)

~@img!!요즘 정서로는 믿기지 않을수도 있는, 전설같은 사실 이야기를 한번 해 보고자 한다. 지금부터 꼭 40년전 이른봄, 철원 최북방 철책에서 경천동지의 사건이 발생했다. 경계구역 안에서 표지판 보수작업을 한후 철수하는 아군병사를 향해 북한군이 총격을 해 온 것 이었다. 우리측의 즉각 중지요구에도 아랑곳 하지 않자, 분노한 우리 군은 즉각 105미리와 155미리의 대포를 동원해 과감하게 응징을 하였다. 이 응전으로 적의 도발진지는 완전히 묵사발이 났고, 그로 인해 천하무적 백골의 소름끼치는 용맹함이 천하를 떨치게 되었다. 잘못 건드리거나 함부로 까불면 혼난다는걸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건 이었다. 그 당시 사건을 지휘한 분은 유명한 p장군 이었다. 결국 그는 책임을 지고 군문을 떠나 야인으로 돌아 갔지만, 조국수호의 강인한 기백은 지금 백골부대의 자랑스런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장군은 내가 푸른제복시절 부대장으로 모시던 최고 지휘관 이었다. 70년대 이른 초엽, 우리부대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장군은 이북말씨의 독특한 억양에다 기상천외의 언행으로 남다른 카리스마를 보여 주었다. 기골이 장대 한데다 부리부리한 눈과 당당하고 절도있는 풍모 등, 전체적으로 풍기는 모습이 전형적인 무골이미지를 하고 있어, 흡사 미국의 조지 패튼장군같은 인상이었다. 그가 부임 일성으로 하신 말씀은 “군기확립과 정신무장” 이었다. 그 조치의 일환으로 단행된 체험적 사례를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다. 우선 사령부중심의 영내부대 전 장사병을, 수십일간 매일같이 완전군장 차림으로 연병장에 소집하여 일조점호를 취하였다. 장중한 주악속에 진행되는 엄숙한 군례는, 마치 원정군 출정식처럼 결연함과 비장함이 감돌기도 하였지만, 새벽잠을 설친 졸병들을 한없이 두렵고 떨게 만들었다. 또 주말이면 야외극장에 수백명의 졸들을 모아놓고 역사안보교육을 실시 하였다. 그는 우리역사를 꾈 정도로 해박 하였는데, 국가의 흥망성쇠는 국민의 단결여하에 달려 있고, 특히 군인의 정신전력에 좌우된다는 점을 아주 높은 톤으로 강조 하였다. 특강이 끝나면 무작위로 질문을 하고, 답을 맞춘 병사는 즉석에서 장군께 신고 한후 특별휴가를 갔다. 가는놈(?)은 룰룰랄라 신바람 났지만, 남아있는 녀석들은 따라지 심정으로 한숨을 내 쉬었고. 그리고 장군은 예하부대 순시때면 혼자 다니시질 않고, 반드시 기관총을 설치한 헌병백차의 칸보이를 받았다. 그럴때면 기습적으로 울려대는 싸이랜 소리에 기겁을 한 졸병들이, 얼마나 허둥댔는지 아마 장군은 모르실 꺼였다. 장군이 우리의 지존으로 계시는 동안 그는 신(神)이었다. 장군의 말씀은 곧 신의 말씀 이었다. 우리는 신의 아들 이었다. 신의 군대가 경인지방을 지키는 일당백의 강군으로 거듭나던 무렵인 1971년 8월23일 오전, 저 유명한 실미도 사건이 일어났다. 일단의 무장 탈영군들은 우리의 경계를 뚫고 들어와 민간버스를 탈취, 서울 턱밑까지 돌진해 갔다. 군경의 강력대응과 자폭으로 살육만행은 수 시간만에 끝났지만, 그 후유증은 사라호 태풍을 능가했다. 신의 군대를 자처하던 체면은 스타일을 구기게 되었고, 혹독한 조사와 기압이 뒤 따랐다. 심각한 사태로 인해, 장군은 아주 높은 곳으로 호출되어 간후 종내 돌아 오시지 못했다. 장군이 불려 가시고 얼마후, 나도 만 3년의 의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적가시권의 전략마을로서, 싸우면서 건설하는 향토예비군의 사명을 다 하던중, 위의 사건이 터진 것 이었다. 그때 비로서 사건의 최고지휘관이 p장군 인걸 알게 되었다. 역시 우리의 위대한 신은 살아 계셨던 것 이었다. 근래 전반적으로 물렁해진 안보의식과 무책임을 극한 비열하고 경망한 행태들을 보면서, 개탄의 한숨을 쉬는 분들이 매우 많다. 우리사회 내부는 다양화라는 수식아래 분열의 간극이 커지면서, 급기야는 누가 적인지도 모르게 헷갈리는 판에 이르고 말았다. 그 통에 큰소리만 치다가 천안함과 연평도에서 어처구니없게 당하고 말았다. 요즘 북한은 온갖 표독하고 패악스러운 말로 공갈협박을 일삼고 있는데, 우리는 좌고우면만 하는건 아닌지 걱정 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시대상황이 40년전과는 비교 할수없을 정도로 다원화 되었고, 국제정세도 그만큼 복잡해 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집단과 침략세력의 위협은 더욱 지능화되고 가중되는 상황에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명심 해야하고, 변하지 않는 사실하나는 우리 국군의 존재 의미이다. 국가와 국민의 절대안위가 그들 어깨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갑자기 40년전의 전설을 떠 올리는 것은, 지난 시절 모시던 분에 대한 인간적 의리 때문이 아니다. 더욱이 그분의 지휘방침을 미화하거나 변호하려는 뜻도 아니고, 무조건적인 응징과 맹목적인 보복심을 부추기려는 뜻이 절대 아니다. 골육지정(骨肉之情)과 수사불패(雖死不敗)의 정신으로 뭉친, 용맹하고 강건한 믿음직한 울타리가 필요 하다는 뜻에서 이다. 군인은 군인 다워야 한다. 청렴결백하고 조국사랑으로 똘똘 무장한, 우직하리만치 당차고 야무진 그런 명지휘관이 그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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