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기고문] 봉명학교에서 만난 여인들

기사입력 2020.03.06 14:26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여성독립운동가와 철원

    사진.jpg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김용빈

     

    2.27일 저녁 철원중고 동문회관에서는 2020봉명학교 아카데미 2번째 강의가 열렸다. 봉명학교에서는 매년 독립운동사를 철원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다.

     

     이번에는 강원여성독립운동가와 철원이라는 주제로 박미현(강원도민일보 이사. 문학박사)강사를 초청하여 어려운 시기 특히 사회적 제약이 많았던 여성들의 독립운동사를 살펴봤다.

     

     박미현 강사는 지난해 3.1절 100주년을 맞아 도내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모아 시·군 순회 전시를 펼치는 등 강원도 여성독립운동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전문가로 꾸준히 연구 해오고 있다.

     

    강사는 먼저 철원여성독립유공자의 현황을 소개 하였다. 독립유공자는 전국적으로 15,825명이고 그중 여성은 2,98%인 472명이며 강원도에서 출생 했거나 활동한 여성은 17명이고 그중에 철원(옛 철원군,김화군)은 3.1만세운동에 곽진근여사, 김경순, 이소희, 학생운동에 왕종순, 이계원, 해외운동에 김도연등 6인으로 강원도에서 가장 많다.

     

     특히 여성은 왕종순, 이소희는 2019년에야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고 다른 이들도 최근에야 공훈이 인정 되었다. 이는 독립유공자의 기준을 형무소 수형 기간이 3개월 이상이어야 공훈 대상인데 당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어려운 시대를 반영하여 최근에 들어서는 여성들은 3개월 미만이라도 심사 대상으로 포함하여 힘들었던 여성들의 항일독립운동이 조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여성들의 독립운동 발자취는 서대문경찰서에 검거되거나 서대문형무소등에 투옥된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보존된 감시대상인물카드(총 약 6만여명 예상) 내용을 보면 4,858중 여성은 179명으로 강원지역 여성은 22명인데 보안법, 치안유지법등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있는 여성은 18명이고 철원지역이 계화성, 박경자, 왕종순, 전선녀, 허균 5명으로 가장 많다.

     

    그 중 허균은 허마리아, 허정균등의 다른 이름을 쓰며 본적은 철원에 두고 충남 당진 출생으로 잠업에 인연을 맺고 잠업교사와 양잠지도원으로 당진, 춘천, 연천, 철원의 묘장면, 동송면 잠업소에 근무를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33년 서울 신설리의 제사·고무공장의 노동운동과 파업지도로 검거,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의 옥고를 치르고 광복 직후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집행위원 및 부인부 책임자로 활동하는 등 여성노동자 인권 향상을 위해 기여하였다. 그의 자료는 검거 당시 조사자료, 신문, 잡지등 풍부한 자료가 있다고 한다.

     

    신문기사에서 찾아보는 항일운동 관련 철원여성들도 많다. 신문은 신문사의 입장, 기자들의 태도와 관점에 따라 내용이 반영되고 일제 강점기의 자유롭지 못한 시대 상황을 감안하여 내용을 참고 하여야 한다고 한다. 신문 기사 중 1907년에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에 여성도 평등한 구성원으로 참여하는데 강원도에서는 60여명의 선각 여성이 동참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25일 1면에 ‘부인출연’이라는 제목으로 철원군 여성의 국채보상운동이 기사가 실렸다. 이 여성들은 봉명학교를 세운 이범하 선생의 어머니 김소사와 부인엄씨, 소몽 이봉하 선생의 어머니 윤소사와 심씨가 의연금과 은가락지를 국채보상기성회로 보냈다는 기사다.

     

    3.1만세항쟁 후인 1920년대 초반 일제의 식민지배 방식을 형식적으로는 문화통치로 전환되고, 일제 식민 자본주의에 대응하여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 되면서 독립운동은 사회운동, 학생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반제국운동등 다양한 항일독립운동 형태로 전개 되었다.

     

    철원은 서울과 가깝고 철도등 교통이 발달하여 왕래가 활발하고 서울로 유학도 많이 보내 일찍이 시대 흐름에 앞서 갔다. 한편 일제 자본가들은 대규모 인력을 저임금으로 수탈하여 큰돈을 벌 수 있는 제사공장, 고무공장, 정어리고장들을 세웠다. 1920년대 중반부터 강릉, 춘천, 철원, 원주, 평창 등지에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제사공장을 지었다.

     

     철원에는 1933년 종연방직에서 제사공장을 신축했는데 나이어린 여성 노동자를 일선 행정의 지원을 받아 철원에서 고성지역까지 모집해 왔다. [조선중앙일보. 1934.7.11. 4면]에 보면 저임금과 열악한 근무 여건에서 300, 400여명이 고생하며 일하고 있었는데 담장을 뜯고 도망을 가기도 하고, 시내에서 살려 달라고 아우성 치고, 감독자에게 잡혀 못 간다고 발악하며 끌려가고, [동아일보 1935.2.12.] 심지어 얼마 되지 않는 상여금을 설 이후에는 고향에서 다시 안 올까봐 뒤로 미루며 상여금을 주지 않았다는 기사 내용이 있다.

     

    그후 [1935. 7. 11 2면] 300명의 직공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분개하여 동맹파업을 벌여 주도한 노동자 20여명이 끌려간 사건으로 제사공장의 불리한 노동조건에 대해 노동자들이 공장주에게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쟁의를 일으켜 일제에 저항함으로써 지역사회에 영향을 주었다는 기사도 있다.

     

    [시대일보 1925.8.8.] 철원무산청년회 주최로 수해동포돕기 동서음악대회에 영춘관 기생 일동이 10원을 의연 하였다 [중외일보 1927. 8. 4] 8세 여아 오순덕이 철원중리의 일본인 등택차랑 소유의 과수원에서 오디를 따먹다가 붙들려 넓적다리살이 도려져 피투성가 되는 사건이 발생 하였다.

     

    이에 철원청년회, 철원형평지사, 철원삼업조합 3개 단체가 긴급 대책회의를 하다가 한밤중에 경찰에 해산 당했다. 신간회도 본부 차원에서 대응하는 등 오순덕 사건이 전국에서 관심을 갖고 지지하였는데, 이렇게 이슈화 되었던 것은 당시 철원의 청년등 단체의 활동이 왕성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강사의 설명이다.

     

    강사는 철원의 독립운동가들이 잘 조명되지 않고 한명 한명의 자세한 활동 내용부족하다는 질문에, 아직도 많은 자료가 번역되지 않았고, 우선 해방 전 일제강점기까지의 역사 정리가 필요하며, 그 후에 철원독립운동이 사회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해방 이후 활동과 영향이 연구 되어야한다고 답을 하였다.

     

    끝으로 더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아직도 서훈이 안 분들이 있는데 왜 그런가라는 질문에는 유공자 서훈은 국가연구원, 시민연구원 그리고 지역 사회와 지자체에서 관심을 같고 꾸준히 추진하여 연구 발표하여 한다는 과제를 주며 지역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깊어가는 밤 시간을 마무리 하였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