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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잊혀진 「봉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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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잊혀진 「봉래호」

한국농어촌공사 영북지사 박종민 과장

~@img!!백과사전을 뒤져도 없고 그 흔한 사이버 검색창에 넣어도 어떠한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남북분단 후 베일에 가려진「蓬萊湖」다. 하지만 분단의 아픔을 겪은 철원 農業人 世代 대부분은 이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거기엔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다. 꿩이 날다 떨어질 만큼 규모가 사방 30여리에 이르는 대형저수지로 동란 이전까지만 해도 철원평야의 경지면적을 적셔 주었다는 저수지 이름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蓬萊號를 다녀왔거나 저수지의 기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설치년도가 너무 오래 되었고 남북으로 갈라진 이후 로는 갈 수가 없는 북녘 땅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애틋한 사연을 가진 봉래호 이지만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한때 철원농업의 젖줄 이었다. 라는 사실 때문이다. 중부지방 최대의 곡창지대를 적셔 준 젖줄, 6.25 비극이 가져온 잃어버린 유산 등 제법 문학적인 제목을 붙여도 괜찮을 듯싶은 蓬萊湖다. 하지만 철원 향토서적을 다 뒤적여도 이에 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번에 찾은 기록물의 대강을 요약한다면 봉래호는 일정시인 1920년대 남북한 통틀어 최대의 토목공사를 벌여 축조된 농업시설물로서 중부 내륙 최대의 곡창지역인 철원평야를 적셔준 대형저수지였다. 하지만 53년도 7월 정전협정 이후 북한 당국에 의해 물줄기가 끊겨버렸고 남쪽에서 용수혜택을 받았던 때를 거슬러 보면 이미 환갑의 나이가 들어 철원농업인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멀어졌다. 다만 인터넷 사이트인 구글을 검색하거나 금학산(947m)정상에 올라 본 사람이라면 남한 땅의 끝이요 북한 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고암산(일명 김일성 고지)옆으로 수평선을 이룬 물주머니를 볼 수 있다. 바로 봉래호저수지다. 문서를 살펴보면 구전으로 전해오는 바와 같이 전국 5대평야에 들었던 철원의 재송평야에 용수공급을 위해 일제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고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저수지를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저수량 4천5백만 톤, 관개면적은 12,000정보에 이르러 철원군과 경기도 포천일부도 적셔 주었다. 쉽게 얘기하자면 한국농어촌공사 철원지사가 관리하고 있는 토교저수지 보다 3배 정도의 저수량을 갖춘 대형저수지로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6.25동란으로 북한 땅에 편입되었고 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엔 물줄기마저 끊어놓는 바람에 전국 5대 평야에 꼽혔던 이 곳 재송평야 일대는 천수답 지역으로 변해버려 불모지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철원을 빼앗긴 김일성이가 통탄하며 물줄기를 끊고 황해도 연백평야로 돌렸다고 전해진다. 동란으로 인한 비극은 포화의 상처뿐만 아니라 삶의 고통을 수반했다. 비무장(DMZ)지대라는 낯선 단어는 살고 있던 주민들을 10 리 밖으로 몰아냈고 물주머니를 잃어버린 이곳 농업인들은 영농 출입증이라는 패쪽을 달고 지뢰밭을 피해가며 천수답을 경작하는 고달픈 영농을 계속해야만 했다. 세종 임금 때부터 평야로 불러온 중부내륙의 재송평야에 변화가 찾아 온 것은 1960년대 중반이다. 버림받은 폐허의 땅에 물줄기가 솟구쳤다. 철원 농업이 일대 부흥기를 맞이한 것은 5.16 군사 쿠테타 이후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고 잘살아 보세! 라는 외침 속에 농업용수원 개발 사업을 서둘렀다. 이러한 외침은 상흔으로 얼룩졌고 폐허의 땅으로 여겼던 철원 땅에서 대형 전천후 사업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 우리고장의 인물을 꼽자면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 원내 총무였던 김재순 의원 이였다. 당시 정권의 핵심그룹에 있던 그 분은 굳게 닫힌 민통선의 문을 열어 제치고 1966년「철원농업용수원 개발 사업」을 완료하여 고장의 젖줄인 토교저수지를 만든 1등 공신이 아닌가 한다. 북한이 고향인 김 의원은 남다른 향토애와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저수지설치사업 착공 6년 만인 74년도에 통수식을 치렀고 착공 12년 후인 1978년에 평야부 공사를 완료함에 따라 철원농업은 부흥기를 맞이했다. 초등학교 시절 전천후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 때는 공사기간이 너무 길어 천천히 하는 공사로 오인하기도 했지만 도내 최대의 곡창으로 불리는 철원 농업의 부흥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물줄기가 끊어짐에 따라 숫한 고생을 짊어진 이들은 역시 철원농업인들 이었다. 봉래호를 수원 공으로 농사짓던 지역에는 토교저수지와 동송 저수지(일명 강산저수지)가 축조됐고 한탄강변에는 대형양수장이 들어서 물 부족을 해결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철원의 드넓은 터전을 동주평, 재송평, 대야잔평 등으로 표기했다. 왕의 행차 또한 조선의 27대 임금 중 철원을 가장 많이 다녀간 분은 세종 임금이다. 조선600년 역사기록에도 한 차례도 철원을 찾지 않았던 임금이 대부분이지만 유독 세종은 태상왕과 상황 그리고 아들 문종과 함께 수 십 차례 이곳을 찾은 기록이 나타난다. 6진 개척과 더불어 강무장이 있었다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나라 살림과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드넓은 평야(농토)가 세종의 마음을 이곳에 머물게 했는지 모른다. 한탄강/남침용 땅굴/노동당사/ 녹슨 철길/애꾸눈 궁예 왕/ 이러한 단어가 암시하듯 따스함이 없는 냉전의 땅으로 불리는 이곳 「중부전선」 철원! 한 반도 지도를 놓고 보면 대한민국의 최북단으로 남쪽의 끝인데 DMZ으로 이어진 지평선 너머엔 철원평야의 일부가 남아있다. 베일에 가렸던 봉래호의 실체가 확인된 만큼 저수지 축조 당시의 제원에 맞는 물 관리가 이루어진다면 철책너머로 펼쳐진 철원평야의 잔 여지와 함께 황량한 평강고원에 이르기 까지 알곡이 영그는 공간으로 바뀔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농어촌공사 영북지사 박종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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