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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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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⑬

식민사관의 원조는 이등박문

~@img!!김영칠 수필가 지금부터 103년전인 1909년 10월26일, 우리 안중근의사가 일본의 이등박문을 통쾌하게 응징 하였는데요. 안의사가 일본법정에서 주장한 이등박문의 죄목은 무려 열다섯가지 입니다. 첫째, 우리국모를 시해한죄, 둘째, 대한황제를 폐위시킨 죄, 셋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죄 등등. 이등박문의 죄악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그의 간악한 책략으로 우리가 입은 가장 큰 정신적 피해의 하나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민족은 당파싸움이나 하고, 자립심도 없어 중국에 기대사는 숙명. 기질적으로 우매하고 열등하여 남의 지배를 받아야하는 체념적인 패배의식이 식민사관 인데요. 일제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간교하고 비열하게도, 우리역사를 은연중에 자조적으로 비하하도록 책동 한거지요. 그 원조가 이등박문이라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요?. 식민사관의 단골메뉴로 제시된 사례가 당쟁(黨爭)과 사화(士禍,사림들의 희생)입니다. 어느 원로지도자 한분은 조선조 당쟁사를 보고 ‘차라리 불살라버리고 싶은 역사’라고 비분강개하기도 했습니다만, 혹시 식민사관의 교육영향 때문은 아니신지?. 당쟁과 사화를 비호하고 미화하려는 뜻이 아니라, 긴 역사의 흐름에서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지배세력내부의 갈등의 일환이 아닐는지. 왕권과 신권, 신권과 신권간의 명분과 이념대결, 정책다툼의 개념으로 본다면, 교활한 야욕달성을 위해 툭하면 칼바람을 일으켰던 일본 무사집단의 하극상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거지요. 역사의 안목을 객관적으로 잡고 타임머신을 타 보신다면, 우리역사는 참으로 끈질기고 치열하고 장대하게 발전해 왔음을 발견 하실수 있는데요. 누가 뭐라해도 우리역사는 지정학적인 여건을 슬기롭게 극복한, 주관과 이념이 뚜렸한 긍지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의 역사만 봐도 고구려705년, 백제678년, 신라992년, 고려는 475년, 조선조는 519년. 일본이나 중국을 비롯하여 세계사에서 단일왕조로 400년이상의 수명인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지요. 긍정적 관점과 객관적 비판의식으로 조선조의 ‘4대사화’를 보실까요. 조선조는 근본적으로 유교국가 였지요. 나라운영과 백성을 다스리는 기본구도가 유학의 가르침위에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문치주의’를 표방해서 학문을 장려하고 글을 가르쳤습니다. 인격과 학문을 닦아야 벼슬을 할수 있고 세상에 나갈수 있었지요. 설령 산림에 은거해 있으면서 벼슬은 못해도, 학문적인 자신감으로 세상에 큰 영향을 준 분들이 많습니다. 선비들은 뚜렸한 학문적주관을 사생관으로 갖고 있어서, 어긋나는 논리나 행위에는 목숨을 거는 각오로 대처했지요. 조선조의 당쟁이나 사화의 배경에는, 학자와 관료등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층과 지배세력간의 치열한 가치관논쟁과, 권력을 둘러싼 역동적인 다툼의 맥락이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 무오사화(戊午士禍,1498 연산군4년) - 연산군이 생모의 죽음을 알고나서 훈신과 사림을 모두눌러 왕 권강화를 시도 하는데요. 이때 사림의 공격을 받고있던 이극돈등이, 사림출신의 사관 김일손이 지은 사 초(史草)를 문제삼아 사림파를 제거하고 피해를 입힌 사건. ●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연산군10년) - 연산군은 생모의 폐비사사(廢妃賜死)에 성종때부터 권력을 누려온 훈신들이 개입돼 있는 것을 알고, 이를 기화로 남아있던 훈신과 사림을 모두 제거한 사건. ●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중종14년) - 중종을 옹립한 반정공신들의 횡포로 사림과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중종은 조광조등 참신한 사림출신 선비를 등용하지요. 조광조는 반정공신들의 책록삭제와 도 학정치를 건의 하는등, 급격하고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훈구파가 조광조일파에 게 누명을 씌워 제거한 사건. 조광조는 억울하게 죽었지만, 사후에 문묘에 모셔진 기묘명현이지요. ●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명종즉위년) - 중종의 아들인 인종이 재위8개월 만에 돌아가고, 인종의 배 다른 동생인 어린명종이 즉위하는데, 두임금의 주위에서 권력을 잡았던 외척들간의 권력투쟁. 약70년간 네개의 큰 사화를 통하여 희생과 진통도 컷지만, 갈등과 각성의 와중에서 명망있는 지식인들이 길러졌고, 이들이 사회와 국가의 중심세력으로 조선조 후반기를 든든하게 버텨주었지요. 어려운 시대를 이끌었던 사림의 창조적 비판정신이 오늘의 우리에게 이어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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