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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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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

닮은꼴인 두명의 태종 이야기

~@img!!김영칠 수필가 ‘당태종 이세민’과 ‘조선태종 이방원’은 여러모로 닮은 꼴 인데요. 서로간에 700여년의 시공차가 있음에도, ①성(姓)과 묘호(廟號)가 같은 점 ②창업을 주도한 점 ③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통치능력을 갖춘 점 ④당초의 후계자 지명에서는 밀린 점 ⑤대권확보를 위해 형제를 살해 한 점 ⑥외형상 아버지에 대한 효성과 충성심을 간곡하게 견지 한 점 ⑦왕족간의 다툼에 국한되어 일반백성들이 피해를 입거나 원성은 없었다는 점(오히려 건국초의 정치적 필요와 시대배경은,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을 바란면도 있었음). 대충 이 정도로 요약 할수 있겠는데요. 당태종 이세민(李世民,599-649)당태종은 말년에 세차례나 우리 고구려를 침공 했지요.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나중의 안시성 싸움에서는 성주양만춘의 화살에 눈까지 다쳐, 그 후유증으로 50세에 갑니다. 그의 아버지 이연은 수나라 양제와 이종사촌간으로, 그 밑에서 지방경비대장직에 있었던 사람인데요. 아들을 셋 두었는데 첫째인 건성, 둘째인 세민, 셋째는 원길 입니다. 이세민은 둘째 였지만 지모와 책략이 출중하고 군사적 역량이 탁월 하였지요.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 경험을 쌓고, 건국사업에 큰공을 세우구요. 이세민의 성장에 두려움을 느낀 건성과 원길은 합세하여 제거를 도모 합니다. 그러나 사전에 이를 감지한 이세민은, 황제의 정궁으로 통하는 현무문에 매복하고 있다가,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황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을 한꺼번에 살해하지요. 당태종은 찬탈이나 다름없는 행위로 등극 하였지만, 그것을 치유라도 하듯 재위 23년간 뛰어난 치적을 남깁니다. 비록 고구려원정의 실패로 스타일은 구겼지만, 즉위초부터 영토확장에 힘써 북쪽의 돌궐복속과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까지 강역을 넓혀, 동서문화교류의 물꼬를 트지요. 그리고 율령격식(律令格式)을 완비하여 제국의 기반을 다지고, 당을 세계문화의 중심으로 만듭니다. 역사는 이를 ‘정관의 다스림(貞觀之治)’이라 하여, 중국역사상 손꼽히는 걸출한 군주로 평가 하지요. 그가 신하들과 나눈 치국의 요체가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실려 있는데요. 역대 군주들의 필독서인 이 책에는, 최고 통치자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깊은 혜안이 담겨 있어서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조선조의 태종 이방원(李芳遠,1367-1418) 태조 이성계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 아들 여섯과 딸둘, 제1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와는 아들 둘과 딸 하나, 이름이 없는 제2계비와는 딸 둘만 두었는데요. 이방원은 정비소생의 다섯째 이지요. 그는 남다른 지모와 야심으로 처음부터 아버지의 오른팔이 되어 전면에서 활약했지만, 건국후의 논공행상과 세자책봉 과정에서는 철저하게 소외를 당합니다. 정도전등 사대부세력들의 입김과 이태조의 편애로 제1계비의 둘째아들이 세자로 결정되는데, 여기에는 왕자들의 정치참여를 껄끄럽게 여긴 정도전등의 견제가 작용을 하지요. 정도전은 사실상 조선건국의 기획자라 할만큼 해박한 지식과 역량을 갖춘 인물로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왕권이 아닌 신권(臣權)이 강한 유교국가, 사대부국가로 만들겠다는 복안을 처음부터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과는 자존심과 명분론을 내세워 대립각을 세우는가 하면, 왕자들이 갖고있는 사병(私兵)조직을 해체하고 진법훈련에 참가 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 정도전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은, 1398년 8월 26일밤 무력으로 정도전과 남은등을 살해하고 간단히 권력을 잡습니다. 그리고 왕자들은 아버지를 다그쳐서 세자를 다시 정하는데, 이때 이방원은 점잖게 둘째형인 방과에게 양보를 하지요. 연이어 이복동생들을 도성밖에서 살해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태조는 그해 9월에 새 세자에게 양위를 하고 물러나지요. 이를 ‘제1차 왕자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靖社)’라 합니다. 연이어 해가 바뀐 1399년 개경시내 한복판에서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납니다. 넷째 방간과 다섯째 방원간의 골육상쟁에서 이방원이 다시 승리하지요. 태종은 비록 피바람끝에 등극하였지만, 누구보다 사직의 미래를 꿰 뚫고 있는 인물 이었지요. 개혁군주로서 강력한 왕권을 통하여 법통을 다시 세우고, 재위18년간 치국의 기반을 확립했는데요. 특히 세종과 같은 현군을 후계자를 선택한 것은, 태종의 탁월한 지인지감이라 하겠습니다. (김 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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