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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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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없이 즐기는 우리역사 얘기

대쪽스승 두분과 문종, 김숙자와 최만리선생

~@img!!김영칠 수필가 성군 세종대왕의 장자 ‘이향(李珦, 1414-1452)’은, 여덟살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29년을 후계자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몸이 허약하여 재위2년만에 돌아가니, 그가 조선조 5대임금 ‘문종’입니다. 문종은 지나치게 착하고 어진 문약함이 있었지만,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 덕분에 뛰어난 학문적 소양을 지닐수 있었습니다. 세종말년에는 7년간 대리청정을 하면서, 측우기의 제작과 군사제도를 개혁하는등 강한 의욕을 보이기도 했는데, 너무 일찍 붕어하는 바람에 높은 꿈을 펼쳐 보지못한 한을 남겼습니다. 그에게는 스승이 두분 계셨는데, 이분들은 조선조 500년역사 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선비들 이었습니다. 기이하게도 두분의 호가 모두 강호산인(江湖山人)으로, 1419년(세종원년) 같은해에 증광문과에 나란히 급제하여 환로(宦路)에 나섭니다. 두분 다 조선성리학의 학통을 있는 대유(大儒)들로서, 불의를 용납않는 강한 소신과 공사의 그릇됨을 좌시 하지않는 대쪽같은 기개를 갖고 있었지요. 세종이 이런 강골의 선비를 세자의 시강관으로 선택한 데는, 세자의 유약한 성품을 강한 기질로 고쳐보려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두분 선비가 보여준 고결한 품행과 거침없는 충언도 일품이지만, 걸출한 선비를 아끼고 감싸안은 세종역시 영특하고 위대한 군주라 하겠습니다. ○ 김숙자(金叔滋 1389-1456)선생 12세때 성리학자인 길재에게 소학과 경서를 배웠고, 31세에 문과급제한후 주로 성균관에 있으면서, 후학들 교육과 세자의 시강관을 겸했습니다. 그는 스승 ‘길재’로 부터 정몽주의 학문을 이어받아, 그것을 아들인 김종직에게 전함으로써 조선도학의 전통을 잇습니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절차를 중시하여 기본바탕의 확립과 체계적인 학습을 강조 하였습니다. 예를들면, 부모형제와 스승에대한 사랑과 존경, 벗과의 우정과 믿음을 읶히지 않으면 다음단계를 가르치지 않았지요. 경전을 배우는데 있어서도, 과목을 뛰어넘거나 줄이지 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순서대로 읶히도록 했습니다. 경전의 해석은 단장취의(斷章取義, 문구를 자르거나 뽑아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를 엄히 경계하고, 반드시 경서의 가르침과 원칙을 지키도록 가르쳤지요. 그러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에만 전념 하지말고, 실행과 실천을 중시하여 학문과 수신의 균형을 강조하는 등, 융통성있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도학에 바탕한 선생의 올곧음은 흙탕물같은 벼슬길에는 거슬리는 점이 많아, 1455년 세조가 즉위한 후에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한후, 제자들의 강학에만 전념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벼슬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산림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한 선생의 만년은, 조선도학의 큰 물줄기를 만든 고고한 선비의 참모습 이기도 합니다. ○ 최만리(崔萬理 1398-1445) 문과성적 우수자로 청요직(淸要職)인 홍문관에 보임됩니다. 잠시 강원도관찰사로 외직을 다녀온 외에는, 학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20여년간 집현전에서 학문연구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인지등과 번갈아가며 왕세자(문종)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가르침이 엄격하면서도 자상하여 전임 시강관으로 임명을 받지요. 선생은 성격이 활달하고 직설적이면서 대꼬챙이 같은 원칙론자 였습니다. 1441년(세종23)에는 ‘흥천사의 사리각 중수반대’등,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한달동안 무려 여섯차례나 올릴 만큼, 직언과 상소를 가장 많이 한 신하로도 유명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의 상소문 내용에 “부처를 섬긴 역대의 임금은 본받을수 없는자”라는, 과격한 표현이 들어 있었는데 세종은 이를 탓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1444년(세종26)에는 소두(疏頭,상소대표자)가 되어 저 유명한 ‘훈민정음반대상소’를 올립니다. 이 상소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 의금부에 갇혔다가 다음날 석방되는데, 그 즉시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한후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흔히들 선생을 ‘훈민정음반대자’로 여기고 있는데, 사실은 훈민정음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집현전 좌장으로서 한글로 된 새로운 한자음의 표기가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음으로 인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라 합니다. 청렴강직한 성품으로, 벼슬이나 재물에는 관심없이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면서도 두주불사의 대주가여서, 세종은 별도의 술잔을 하사 할 만큼 선생을 아꼈습니다. 사후에 청백리로 녹선 되었구요. “현명한 이가 재물을 탐하면 큰 뜻을 해치고, 어리석은 이가 재물을 갖게 되면 잘못을 더한다”. 누옥(陋屋)에 걸었던 선생의 좌우명 입니다. (김영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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