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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철원이 낳은 항일 독립 운동의 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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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철원이 낳은 항일 독립 운동의 거목

우성 박용만 서세 92주기를 맞아

김용빈.jpg
철원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김용빈

 


10월 17일은 항일독립운동의 거목 박용만 선생의 서세 92주년으로 철원독립운동기년사업회와 박용만선생철원기념사업회에서는 지난 17일 철원초등학교 교정의 추모비를 찾아 추모식을, 18일 일요일에는 철원소망교회에서 추모예배로 추모의 시간을 진행하며 선생의 뜻을 기리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코로나 19로 아쉽게도 적은 인원만이 참여하였으나 다음에는 선생의 위업을 더욱 되새기는 시간을 준비하는 마음이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나라를 빼앗겼던 일제 36년 그리고 국운이 기울던 시절 의병들의 항쟁으로 반세기는 일본의 침략과 노략질에 항거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초들의 힘으로 이 땅의 자주 독립을 이루기 위한 고난의 역사가 있었다그 중에 발자취가 잘 남아서 조명을 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 잘 보이지 않거나 심지어 잃어버린 이도 있을 것이다.

 

철원의 우성 박용만은 1881년 여름 철원군 철원면 중리 109번지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부터 사회에 관심을 갖고 활빈당 활동황무지개척권반대투쟁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루기도 한다일본으로 유학을 하여 국제적 견문을 넓히고 이후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며 ROTC로 임관하여 우리나라의 현대군인의 시원이 되고 학사장교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는 단순히 학업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방책을 세우고 실천해내는 괴력의 투혼을 발휘했다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남의 힘이 아닌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무장투쟁을 강조했고 실제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하였다학업을 하는 한편 학교 당국의 승인을 받아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워 일하며 군사 훈련을 받는 군사 학교를 직접 운영 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미주 한인 동포 사회에 항일독립 정신을 고취 시키고 독립자금 모금에 적극 나서도록 동포들을 조직화 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는 대조선군민군단이라는 군사전문학교를 창단하여 장교를 양성하고 매년 호룰루루 시가지에서 군사 행진을 펼치는 당시로는 어마 어마한 일들을 실행해 내었다그러나 이 시기 이승만의 정치적 야욕으로 학교가 중단 되었는데 항일무장투쟁 준비를 훼방한 행위는 분명히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하와이에서 중국으로 터전을 옮긴 후에도 독립을 향한 열정은 멈출 줄을 몰랐다북경에 흥화실업은행을 세우고 농장을 세우며 자금을 독립 자금을 조달할 준비를 하였다.

 

그는 언론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1911년 미국에서 하와이에서도 신문사를 운영하고 주필로써 당시 독립운동의 정신을 강화 하였다한글 교과서를 집필하고 소년병학교의 교재를 직접 만들고 국민 개별설등 수많은 책을 집필하여 독립운동가 중에는 제일 많은 도서를 남겼다고 한다그는 군인으로 사상가로 언론인으로 두루 활동을 하였고 그 무대가 태평양을 넘나들며 국제적 감각으로 움직였으며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투지를 보여 주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일제가 강제 합병을 한 후 바로 무형국가론(임시정부)론을 주창하여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임시정부 초기 잠시나마 외부총장의 역할을 맡기도 했었다그러나 제한적인 임시정부의 역할을 넘어 더 크게 활동을 하고자 외부총장 자리를 내놓고 함께하는 동지들을 더 크게 조직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의 항일독립운동의 영역과 크기는 그 어디에도 견주기도 어려우나 아직도 국가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고향인 철원에서까지도 아직까지 희미하게만 보이고 있어 안타까움이 산 같이 크다그가 걸었던 길의 기록은 몇 안 되는 서책이 있을 뿐 학계의 연구도 빈약하다이는 친일파를 계승하고 독재자인 이승만과 자주독립의 기치를 내 걸었던 박용만은 정치적 숙적 관계로 그 동안 학계에서 조차 박용만선생을 외면해 온 결과이다그의 마지막은 북경역 앞의 자택에서 비운의 총탄으로 운명을 하였다.

 

당시 일제는 선생을 불령선인의 령수로 지목하고 늘 주시하며 감시를 하고 있었기에 역사 속 검은 그림자를 밝혀내는 것은 아직도 과제로 남아 있다자세한 내용은 지역 신문의 지면에 매주 우성 박용만의 실화소설 [칼의 길]이 연재되고 있으니 독자들의 관심을 바란다.

 

멀리 그가 활동했던 미국과 카나다의 뜻있는 교포들은 선생의 위업이 이제는 역사의 전면에 들어나기를 고대하고 있으며 그 일이 국내에서 먼저 시작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이제는 고향인 철원에서 선생의 거대한 발자취를 온전히 역사의 반열에 올려놓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생가터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세우고 건국훈장 대통령장인 훈장의 품격도 그의 업적에 어울리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승격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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